요한복음 14장 25-31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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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너희는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다시 온다고 한 내 말을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하려는 것이다. 나는 너희와 더 이상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 다만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내게 분부하신 그대로 내가 행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려는 것이다. 일어나거라. 여기에서 떠나자.”

해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신다.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26절)이라고 하신다.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으로 인해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27절) 말아야 한다. 오히려 세상 그 무엇으로도 흔들 수 없는 든든한 평안을 경험해야 옳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27절)고 하신다. “세상이 주는 평화”라는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당시 로마 제국이 선전하던 “팍스 로마나”(로마가 군사력으로 이룬 평화)를 마음에 두고 계셨을 것이다. “평화”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불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이 온전한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성을 해결하지 않고는 ‘온전함’을 얻을 수 없다. 

예수님은, 자신이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한 일이라고 하신다(28절). 성령의 시대가 열려서 모든 믿는 이들이 언제, 어디서나 그분과 함께 동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자신의 죽음에 준비시키기 위함이다. 29절의 “그 일”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일을 가리킨다. 그분은 “이 세상의 통치자가 가까이 오고 있다”(30절)고 하신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사탄을 의미하기도 하고, 세상의 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사탄이 세상의 권력자를 이용하여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오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30절)고 하신다. 그분의 참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씀하신 다음 당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해 나아가신다(31절).

묵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 성령께서 함께 하십니다. 때로는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를 통해 성령의 내주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런 외적인 표시가 없어도 믿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12:3)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고백은 성령께서 이미 그 사람 안에 내주하고 계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영적인 사건은 어떤 느낌이나 증상을 근거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다면, 지금 내가 성령의 손에 잡혀 있고, 내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며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때로는 변호사로, 때로는 위로자로, 때로는 교사로, 때로는 고발자로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믿음은 능동태가 아니라 수동태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손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며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그분의 손에 잡혀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안식과 만족을 얻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섭니다. 

믿음 안에서 얻는 이 평화는 이 세상 그 무엇도 흔들 수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믿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입니다. 큰 일을 당하여 근심과 염려에 사로잡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믿음의 사람은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잠시 흔들리지만 곧 평정심을 찾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통치자는 우리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몸은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마 10:28) 존재입니다. 우리는 몸과 영혼을 모두 살리시는 분의 손에 잡혀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의 능력입니다. 

요절: 27절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기도:

저희 안에 성령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늘 깨어 살게 해주십시오. 성령의 인도하심을 분별하고 의지하게 해주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그 평안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2 responses

  1. bull9707 Avatar

    후일에 어떤 교인들은 믿음을버리고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고 예언하신 성령님의 예언이 생각납니다, 신자와 교회를 멸시하고 비난하는 세상입니다. 이스라엘,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더 확산되어갑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이지 않습니다, 애매한 민초들만 고통을 당하고 온세상이 근심과 걱정속에서 신음을 하는 형편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둡니다, 그분은 모든 믿는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신것을 믿기때문입니다. 사랑의 하나님, 평화의 왕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마라나타!,, 아멘.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주는 평안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는 잠시 ‘평화처럼’ 느껴지다 사라지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이 남기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세상의 평화와 예수님의 평화는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남기는가, 남기지 않는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설에서 알 수 있듯 주님의 평화는 내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되어 근심하지 말아야지,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유지하는 평화가 아닙니다. 근심할 일, 두려워할 일 앞에서도 고요해지는 마음입니다. 내가 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도와주셔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초인’이 되라는 말씀일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니체의 철학에서 나온 초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종종 같이 사색하게 되는 개념입니다.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니체의 철학이 반기독교적이거나 반예수적이라며 디스카운트하고 멀리 내치지만, 자기의 생각과 세계를 가꾸는 마음으로 찬찬히 조금씩 음미하면 니체의 초인은 예수님의 말씀과 부조화가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놀라울 것이 없는게, 니체 뿐 아니라 서양 철학의 뿌리는 기독교적인 세계 질서와 이해 안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근대 철학이나 심리학이 고민하고 저항한 부분 -그것이 옛 질서이든, 고통의 뿌리이든-의 공통점으로 ‘아버지 father’ 를 들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불화, 아버지의 집을 떠남 등의 주제입니다. 이 아버지는 기독교의 아버지, 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당부는 우리가 처한 환경과 상황 너머를 보라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믿으라는 말씀은 ‘지금 여기’에 충실할 것과 ‘지금 여기’를 초월하라는 반대의 메시지를 동시에 품고 살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예레미야서를 읽을 때 가졌던 긴장감, 바빌로니아에 가서 땅을 일구고 이웃과 화목하며 아들 딸 결혼 시키며 잘 살라는 명령 앞에 ‘파괴된 고향은, 무너진 성전은 어떡합니까’하며 마음 아파하던 긴장감이 결국 믿음의 한 부분이요 믿음의 현실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교훈을 ‘지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해야 정직한 읽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 노력을 돕기 위해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는 것 아닐까요. 이 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살 듯이 살기가 어렵기 때문에. 주님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께서 해온 일들을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더 큰 일도 할 것 (12절)이고 하신 뜻을 전혀 알아 들을 수 없었는데, 주님의 평강을 마음에 지니면 가능하다는 말씀이군요. 세상의 평안을 넘어가는 일, ‘세상이 주는 평강에 안주하지 않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성령님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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