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1장: 중심에 두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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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이스라엘 자손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지 이 년이 되던 해 둘째 달 초하루에, 주님께서 시내 광야의 회막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을 각 가문별, 가족별로 인구를 조사하여라. 남자의 경우는 그 머리 수대로 하나하나 모두 올려 명단을 만들어라. 너는 아론과 함께,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스무 살이 넘어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남자들을, 모두 각 부대별로 세어라.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곧 한 가족에서 지도자가 한 사람씩 나오게 하여 너희를 돕게 하여라(1-4절). 

이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이, 각 집안에서 한 사람씩 뽑힌 이스라엘의 열두 지도자들과 함께 조사하여 등록시킨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할 수 있는, 스무 살이 넘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각 집안별로 등록되었다. 등록된 이들은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다(44-47절). 

그러나 레위 사람은, 조상의 지파별로, 그들과 함께 등록되지 않았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분부하여 이르셨다. “레위 지파만은 인구조사에서 빼고 이스라엘 징집자 명단에 올리지 말아라. 그 대신 너는 레위 사람을 시켜,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보살피게 하여라. 모든 기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비품을 그들이 관리할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옮기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옮기는 일을 맡을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돌보며, 성막 둘레에 진을 치고 살아야 한다. 성막을 옮길 때마다 레위 사람이 그것을 거두어야 하고, 성막을 칠 때에는 레위 사람만이 그것을 세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다가갔다가는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각기 부대별로, 각기 자기 진 안의 부대기를 중심으로 장막을 쳐야 한다. 그러나 레위 사람은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 둘레에 진을 쳐서, 나의 진노가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내리지 않게 해야 한다. 레위 사람은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보호할 임무를 맡는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다 그대로 하였다(48-54절).

해설:

이집트를 떠난 지 2년 2개월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회막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인구 조사를 명하신다. 각 지파의 대표를 뽑아 지파별로 스무 살이 넘는 남성들의 명단을 작성하게 하신다(1-5절). 본격적인 광야 유랑을 위해 백성을 군대식으로 조직화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개 인구 조사는 경제적 목적(과세)이나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실행된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열두 지파에서 대표를 뽑고, 그들이 각 지파의 스무 살 이상의 남자들을 등록시킨다(16-19절). 그 결과, 르우벤 지파 46,500명, 시므온 지파 59,300명, 갓 지파 45,650명, 유다 지파 74,600명, 잇사갈 지파 54,400명, 스불론 지파 57,400명, 에브라임 지파 40,500명, 므낫세 지파 32,200명, 베냐민 지파 35,400명, 단 지파 62,700명, 아셀 지파 41,500명, 납달리 지파 53,400명, 총 603,500명이 등록한다(20-47절). 이십 세 이하의 남성들과 여성들을 모두 합치면 대략 2백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수치는 많은 이들에게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2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동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의문에 대해 학자들은 여러가지의 의견을 개진해 왔다. 이 수치를 상징으로 해석하려는 사람도 있었고, 후대의 관점에서 수치가 부풀려졌다고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 어떤 이론도 이 의문을 말끔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 수치가 역사적으로 믿을만 한 것인가?” 라는 질문은 정당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민수기의 의도와는 빗나간 질문이다. 이 수치를 제시하면서 저자는, 이집트에서의 사백 년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5:5)을 이루어 주셨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인구 조사에서 레위 지파는 제외하라고 하신다. 그들은 전쟁에 참여할 의무를 벗는 대신, 1) 성막과 성구들을 관리하고, 2) 행군할 때 성막과 모든 기구들을 운반하며, 3) 성막 둘레에 진을 치고 살면서 그 거룩함을 보존해야 했다(48-53절). 이스라엘 백성이 한 곳에 진을 칠 때면 성막은 그 진에 가운데 있어야 하고, 행군할 때면 성막과 성구를 짊어진 레위 지파는 행렬의 중간에 서야 했다. 

묵상: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됩니다. 열두 지파의 이름을 보면, 야곱이 라헬에게서 얻은 큰 아들 요셉의 이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축복을 해 줌으로써, 그들은 삼촌들과 함께 이스라엘의 족장이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그로 인해 지파의 수는 열셋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 항상 “열두 지파”라고 말합니다. 레위 지파는 따로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성막 관리와 성막에서의 제사를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동원될 의무에서 면제되었습니다. 제사가 전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했을 때, 레위 지파는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성막(솔로몬 후에는 성전) 관리와 성전 제사를 위해 전념하게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십일조 헌금은 토지 분배를 받지 못한 레위인들의 생계를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열두 지파의 영적 필요를 위해 구별되었으니, 열두 지파는 레위 지파의 육적 필요를 책임져야 했습니다.

레위 지파에 대한 이러한 특별한 배려는, 성막과 제사가 삶에 있어서 중심적인 요소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유물론자들은 그러한 배려를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레위 지파 사람들을 “놀고 먹는 사람들” 혹은 “하찮은 별로 일을 위해 사는 사람들”로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막을 이스라엘 진의 중심에 두고 레위인들을 따로 구별함으로써 그분이 우선이고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요절: 50절

그 대신 너는 레위 사람을 시켜, 증거궤가 보관된 성막을 보살피게 하여라. 모든 기구와 그 안에 있는 모든 비품을 그들이 관리할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옮기는 일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기구를 옮기는 일을 맡을 것이다. 그들은 성막을 돌보며, 성막 둘레에 진을 치고 살아야 한다.

기도:

저희 마음이 물질주의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전쟁보다 예배가 먼저인 것을 자꾸만 잊어버립니다. 저희 안에 시간의 성소를 세우고 그 안에 머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데, 다른 일로 휘둘려 시간의 성소를 황폐하게 만들곤 합니다. 저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시고 고쳐 주십시오. 주님을 저희 삶의 중심의 자리에 모시고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6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십자가 은혜를 허락하신 창조주 사랑의 하나님께 예배를 먼저 드려야한다고 항상 생각하고 결단하지만 삶에서 우선순위를 바르게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럼에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은혜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부터라도 주님께서 허락하신 환경에서 충실히 맡겨진 임무를 불평없이 감당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순복하며 가나안땅에 들어 갈때까지—- 아멘.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 주여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캄캄한 구름 사이로 쪽 빛 하늘이 비취고 승강장에는 청량한 바람이 일렁입니다. 수요일 아침. 분주한 한 주의 반환점인 셈이에요.

    성경 말씀을 읽습니다 (민수기 1장). 60절이나 되는 긴 장이지만 같은 문장이 지파이름과 그 지파의 민수 (head count)만 바꿔 반복되고 있어 읽기 어렵지는 않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장자의 죽음이라는 벌을 유월(Passover)한 백성들. 그들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처럼 큰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군역 대장에서 제외된 레위의 자손. 전쟁보다도 더 중요한 제사를 담당하기 위해 따로 구별되네요.

    사흘 연속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좀 늦은 시간이라 나들이 승객들이 많은 듯. 오늘은 오랜만에 프레젠테이션을 맡아서 좀 긴장하고 있어요. 밤에 자게 하시고 아침에 주신 하루를 호흡하게 하심을 감사. 가족을 주셔서, 아직 일할 수 있어서 감사.

    대속의 보혈로 인해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레위인으로 다시 지어진 자. 택하신 족속, 왕같은 제사장, 그의 소유된 백성임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포도나무 되신 주 안에 가지로 마물며, 공급해 주시는 사랑의 능력으로 서로 사랑하란 주의 계명을 지키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주와 함께 이 광야를 걸어 마침내 시온으로 들어가는 나날,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3.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 저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말씀의 가치를 누리며 살아야 함에도, 발달한 물질문명 속에서 눈에 보이는 것만 쫓는 나약한 존재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바라옵건대, 먼저 저희의 마음 중심에 물질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어 날마다 묵상하며 살게 하소서. 또한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가 사람의 생각이나 유익 중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리는 곳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께서 동행하시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아멘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광야를 떠올리면 마음이 스산해 집니다. 벌을 받는 곳 같이 느껴지고 끝이 없는 고난의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들어갔을 때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참 우울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로 광야에 접어든 것이고, 인구조사를 해서 백성을 조직하는 일은 슬기로운 광야 생활을 위한 시작점입니다. 광야의 이미지가 빈 공간이라면 백성의 이미지는 일사천리로 움직이는 질서의 표본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과 백성이 추는 댄스의 무대입니다. 공허하여 아직 아무 것도 없는 듯한 광야에 하나님은 질서를 만드십니다. 창세기 스토리와 같은 틀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는 창세기에서는 일과 쉼으로 나타났고 민수기에서는 역할의 구분 즉 구별됨, 성별됨으로 나타납니다. 묘하게도, 하루 전에 베드로와 요한의 삶이 다르게 진행될 것을 (실지로 그렇게 되었고) 예고하는 요한복음서 끝부분을 묵상했던 것이 오늘 민수기 1장에서는 성별된 백성, 구분된 역할을 명령 받은 백성의 스토리와 만납니다. 이런 연결 (내가 자유롭게 하는 연결이긴 하지만)을 볼 때 성경읽기는 즐거운 독서가 됩니다. 민수기 1장에서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어떻게 쓰시 지 알려 주십니다. 출애굽을 한 백성의 스토리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 도리어 눈에 확 띄는 역설이 있습니다. 여성과 아이와 이방인은 빠져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이들은 ‘사람’이 아닌 겁니다. 인구조사는 징집할 수 있는 인원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60만명 정도입니다. 20세 아래와 노령의 남성, 모든 연령대여성과 이집트에서 같이 나온 타지역 출신자들 등 인구조사에서 빠진 사람들이 60만명의 두배가 넘을 것으로 추산하면 전체 200만명이 광야에 있었던 것으로 추산합니다. 전쟁에서 쓸 수 있는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카운트도 되지 않았으니 쓸 데가 없다고 봐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 지파와 열두 지파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레위 자손은 성막을 지키는 특별한 임무를 받았습니다. 성막 은 전쟁시와 평화시를 막론하고 광야 백성의 심장입니다. 싸울 수 있는 군인의 숫자가 얼마가 됐든 레위지파가 하는 일은 광야의 질서가 잘 돌아가게 하는 일입니다. 심장이 피를 잘 돌려야 온 몸이 사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입니다. 여성은 왜 뺐을까, 레위 지파가 뭐라고 이런 중대한 일을 감당할까, 이런 궁금증은 덜 중요하고 시급한 고민일 것입니다. 66권을 적어도 한 번은 묵상하고 구약의 남성중심적인 스토리텔링에 익숙해진 지금의 결론은 우리의 시선과 하나님의 시선이 교차하기도 하고, 평행을 긋기도 하면서 하나님의 그림, 하나님의 춤이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시간의 한계 (수천년 전의 사람들)와 공간의 제약 (광야, 가나안, 예루살렘, 로마, 유럽, 아시아 등등)을 다 포함하면서 동시에 다 뛰어넘는 위대한 성서의 스토리는 우리 삶의 원형 혹은 모든 같은 유형의 대표적 예 archetype 입니다. 사람의 스토리라는 보편성과 나의 스토리라는 특수성이 성경 스토리에 담겨 있습니다.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의 심장이고 이스라엘은 심장을 감싼 몸입니다. 한국에 오자마자 시차와 관계없이 일을 보고 있습니다. 가게를 정리한 기념으로 떠난 셀프 보상 휴가인데 첫 주에 봐야 할 일들이 몇 가지 있어 휴가왔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일을 보는 사이사이에 친구들을 만납니다. 8년 만에 얼굴을 보는데도 어제 만나고 오늘 또 만난 것처럼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미국 사람 (나)의 경험과 한국 사람 (친구)의 경험이 별로 다를 바 없습니다. 글로벌 시대라서, 소셜미디어로 경험을 나누는 시대라서 그런 것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삶의 원형, 인간의 존재적 조건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야의 백성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 역시도 같은 이야기일 것 같은, 그래서 공감과 이해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합니다. 복음서를 연구하는 (유대인, 여성) 신학자 에이미 질 르바인 교수는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스토리에서는 악역이지만 그래서 예수님의 메시지가 바리새인은 나쁜 인간들이니 그들을 따르지 말라, 미워하라, 멀리하라라고 보는 데 그친다면 풍성한 성경 이야기를 편협하고 좁게 읽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타인을 이해하고 나와 다른 이들과 공존하며 평화와 사랑을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복음서 읽기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스토리의 심장입니다. 심장은 자신 만을 위해 뛰지 않습니다. 심장이 뛰기에 각 기관과 장기는 자기 자리를 지킬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나의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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