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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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는 매우 적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신약의 27권 중에 신학적, 문학적 탁월성을 높이 인정받는 편지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소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신도들에게 보내어 돌려가며 읽도록 쓰여졌습니다. 베드로가 썼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렇게 볼 만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 사도의 편지 후에 그분의 수제자 베드로의 편지가 따라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야고보서처럼 편지 형식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다루고 있는 주제들은 특정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지역, 어느 시대에나 적용되어야 할 신앙의 근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2절: 거룩함을 향한 부르심

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베드로가,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인, 택하심을 입은 이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셔서, 여러분은 순종하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더욱 가득 차기를 빕니다.

해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베드로는 당시의 편지 양식을 따라 발신자를 밝힌 다음 수신자를 밝히고 축복의 인사를 전한다. 그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1절)라고 소개한다. 바울 사도 역시 동일한 말로 자신을 소개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신분을 밝힌 것이 아니라, 이런 글을 쓸 만한 자격을 밝힌 것이다. 그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받은 사람으로서 이 글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는 소아시아(지금의 튀르키예)의 북부 지방에 위치한 로마의 속주들이다. 도시 이름의 순서는 이 편지의 전달자가 방문한 순서와 일치했을 것이다. 그 지역에 사는 신도들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라고 부른다. “흩어져”는 헬라어 ‘디아스포라’의 번역이다. “나그네” 혹은 “일시 거주자”라는 정체성은 구약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미지다. 이 정체성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영원한 고향이 따로 있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르게 산다”는 의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은 과거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거룩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쓴다. 그로 인해 믿는 이들은 자기 땅에서 “이방인”이 된다. 믿는 이들이 자주 혐오와 배척과 박해의 대상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드로 사도는 그들이 “흩어진 나그네”가 된 이유를 여러 가지 표현으로 설명한다. 그들은 “택하심을 입은 이들”(1절)이다. “택하심을 입었다”는 말은 “새로운 백성으로 부름받았다”는 의미다. 교회는 새 언약 백성 즉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을 “미리 아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2절) 해 주셨다. 

“미리 아시고”를 “예정하시고”라는 의미로 왜곡하지 말아야 한다. “아는 것”과 “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미리 아시고”에는 구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 ‘야다’의 의미가 담겨 있다. 히브리어 ‘야다’는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미리 아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전부터 관계를 가지고 계셨다” 혹은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셨다”는 의미다. 그 관계 안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새로운 백성으로 세우셨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을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했다. 이스라엘이 그 일에 실패했을 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선민을 일으키셨다. 따라서 성령으로 거룩하게 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제사장의 나라로서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았다”는 표현은 출애굽기 34장 8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피를 뿌리며 그 언약을 확정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새 언약을 위한 피를 뿌리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의 피뿌림을 통해 맺은 새 언약 안에 들어간다. 

베드로 사도는 편지 형식에 따라 수신자들을 축복하는 인사말을 덧붙인다. “은혜”는 그리스-로마식 인사말이고, “평화”는 유대식 인사말이었다. 두 가지의 인사말을 결합시킴으로써 누구에게나 친밀한 인사말로 만들었다.

묵상: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에게 일어난 일을 한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입니다. 구약성경에도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창 23:4; 레 25:23; 시 39:12; 119:19; 대상 29:15).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고향이 따로 있는 사람들”(히 11:14)입니다. 그런 점에서 믿는 이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요 임시 거주자입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믿는 이들은 “고향이 따로 있는 사람들”이기에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있어서 이 땅을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는 믿는 이들에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옛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않는 백성이 됨으로 인해 선민으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장차 때가 이르면 새로운 언약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렘 31:31).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쏟으신 이유가 새로운 언약을 맺기 위함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눅 22:20).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언약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변화받을 때,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갑니다. 그러한 삶이 그들을 “자기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사람”이 되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 5:13), “너희는 세상에 빛이다”(마 5:14)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과 구별됩니다. 세상 속으로 흩어지지만 세상을 속으로부터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흩어져 사는 나그네”로서 믿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차별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을 살리는 존재가 됩니다.

요절: 1-2절 전체

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저희를 볼 때 자신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될까요? 교회 다니는 것 말고, 식사 기도하는 것 말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뭔가 다르다”는 생각을 할까요? “믿는다고 다를 게 뭐야?” 하고 질문하지 않을까요? 저희는 정말 믿는 것일까요? 성령으로 거룩해져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에 저희가 정말 진심일까요? 저희를 위해 피를 뿌리신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흩어져 사는 나그네”의 모습이 더욱 진해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아멘.  

5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매일 아침, 말씀이 육신이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사귐의 소리를 읊조리는 축복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십자가의 은혜에 감사하고 부활을 믿게하시고 승천과 재림을 약속하시심으로 소망을 허락하신 주님께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이토록 귀한 시간을 헛되히 하지않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깊고 긴밀한 사귐으로 주님 닮아가고 말씀 순종하며 본향을 향하여 걷는 순례자가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사귐의소리 가족 모두 함께 걷는, 주님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며——아멘.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교황 레오 14세가 발표한 ‘위대한 인류 Magnifica Humanitas’는 교황이 카톨릭 교회와 인류에게중요한 신앙적 가르침을 담은 공식 문서입니다. 한국어로는 회칙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Encyclical letter 엔시클리컬 레터 혹은 엔시클리컬 encyclical 이라고 합니다. 회람해서 (돌려서) 읽는다는 뜻의 회자를 씁니다. 오늘부터 읽는 베드로전서는 ‘베드로의 회칙’이겠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서와 사도들의 편지입니다. 사도들이 식구나 친구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형성된 지역 공동체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가 발신인이라고 하는 서신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요한과 야고보, 베드로도 교우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우리가 교황의 메시지에 주목하며 귀 기울이듯 이국 땅에서 사는 수신자들 역시 실로 반갑고 감사한 마음으로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 읽고 들었을 것입니다.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서 사는 나그네들’이라는 구절을 ‘엘에이와 뉴욕, 버지니아와 아틀란타에 흩어져서 사는 한국인 신자들’ 이라고 바꿔 보기도 하고, 월드컵의 열기를 담아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 유럽과 중동, 미국, 아시아 의 크리스찬들’에게 라고 바꿔서 읽어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마음에 품고 쓴 수신자들이 주로 유대인 디아스포라였는지 이방인 크리스찬이었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싶습니다. 과거가 어떠했든지 지금 이들은 선택 받아 피뿌림을 받은 (거룩하게 된) 백성입니다. 베드로의 수신자와 우리가 다른 점은 기독교인 핍박의 시대와 크리스찬 내셔널리즘의 시대라는 시대적인 차이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염려했던 것은 제국의 힘에 눌려 고통받는 백성이었고, 레오 교황이 우려하는 것은 권력과 금력을 쥔 리더들이 세워가는 세계입니다. 베드로 시대의 크리스찬은 제국의 인싸이더가 아니었습니다. ‘크리스찬이라서’ 권력의 박해 대상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크리스찬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고 원하면 사회의 중심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리더들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바뀐 세상입니다. 그런데도 ‘복음’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권력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향력을 넓히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예수를 전하고자 애쓸 일입니다. 복음은 나를 사랑하듯 모든 이를 사랑하는 예수입니다. 나만 사랑하는 예수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이 -베드로가 썼든지, 다른 사람이 썼든지- 전세계에 흩어진 크리스찬들이 읽고 들으며 마음에 새길 엔시클리컬 레터가 될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수님이 곧 재림해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믿음은 변하는, 변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이라는 대상이 없으면 믿음은 지극히 사변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놓고 봐도 너무나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기계화, 자동화 이런 말들이 어느새 인공지능의 지배를 걱정하는 말로 바뀌었습니다. ‘청춘 남녀가 만나 결혼을 약속한다’는 단순한 문장이 ‘환타지’ 소설의 한 줄처럼 들리는 세상입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랄 세상입니다. 이렇게 깜놀할 세상을 예수님의 손을 잡고 침착하게, 겸손하게, 올곧게 살아가라는 뜻으로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베드로의 주님, 당신은 메시야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베드로의 예수님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창밖은 아직 어둡습니다. 새벽 공기가 청량한 수요일 아침. 집을 떠난지 이제 일주일이 지난 것 같아요.

    본문을 읽습니다 (벧전1:1-2). 짧지만 문장 구조가 복잡해서 여러번을 읽어봅니다. 사도 베드로가 여러 지역 교회에게 보내는 서신. 편지의 수신자는 “새언약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 (God’s elect)들이고 이 땅의 “나그네“(exile) 들. 나그네라는 말을 곰곰히 씹어봅니다.

    나그네이므로 이 땅은 진짜 집이 아닙니다. 돌아가야할 집이 있습니다. 나그네이므로 이땅의 삶은 광야의 여정입니다. 그러니 길을 잃고 표류하면 안 되지요.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은 가나안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의 길,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걸어가는 순종의 여정이 되어야 하겠지요?

    이제 창밖이 점점 밝아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 쓸데없는 것의 인생 가운데도 늘 함께 해주신 에벤에셀의 주님. 오늘도 코끝에 생명의 숨을 주시고 모든 것을 주심에 감사. 이 땅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을 다시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주와 함께 길 걸으며 상황과 환경을 넘어 기뻐하는 삶, 감사하는 삶, 기도하는 삶이 되었으면.

  4.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장 아름다운 신분증은 다름 아닌 ‘얼굴 표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다가가 대화할 수 있는 따뜻한 인상은 사람의 닫힌 마음을 여는 통로가 됩니다. 우리가 만나는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미소로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때로 다가가기 힘든 무표정한 이들을 만날 때도, 우리가 먼저 주님의 사랑으로 그 장벽을 깨뜨릴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심령에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화평과 평안함이 가득하게 하사, 그 은혜가 자연스럽게 얼굴 표정으로 배어 나오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얼굴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증거하는 통로가 되도록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5.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오늘은 4시까지 잠을 잤습니다. 고국에 온지 일주일. 이제 꽤 시차적응이 되었나봅니다. 구름이 많이 낀 목요일. 미명이 밝아오네요.

    오늘의 본문 (벧전1:3-9). Phil Wickham의 노래로도 유명한 “산 소망” (Living Hope) 이야기. 부활을 통해 우리도 다시 태어나게 하신 이. 거듭난 우리들은 “산 소망” 되신 예수 안에서 ”주의 나라“를 하나님의 독생자와 함께 물려받는 자리, 곧 “하나님의 자녀” (children of God)라는 특권의 자리로 초청받습니다.

    그 부름 때문에 고난은 이제는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연단으로 변하고, 살아있는 그 소망이 절대 깨지지고 녹지도 않는 인내를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방인으로 이 땅에 살면서도 믿음의 목표 곧 본향을 향해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겠지요?

    이제 곧 아버지가 일어나실 시간이네요. 하루를 시작합니다. 간밤에 잠을 주시고 아침에는 눈 떠 숨 쉬게 하심을 감사. 가족을 주셔서, 사랑하고 사랑 받을 수 있어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모두 주의 은혜임을 감사.

    연로하신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한 이번 여정을 끝까지 지키시고 축복하시길. 산 소망이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시험과 실망을 능히 견뎌내며 기다리기를, 바라기를, 기빠하기를 멈추지 않는 나날이 되었으면.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증거가 될 그 때. 주님의 때가 끝내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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