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3장 18-22절: 주님의 길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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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지을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방주에 들어가 물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겨우 여덟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그 물은 지금 여러분을 구원하는 세례를 미리 보여준 것입니다. 세례는 육체의 더러움을 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 선한 양심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

해설:

앞에서 사도는 신도들에게 의를 위해 고난 당하는 것은 복된 일이라고 말한 다음,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당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처럼 의로운 분도 고난 당하셨다면, 그분을 믿는 이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다”는 말은 구약 시대의 제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짐승으로 드리는 속죄 제사는 반복해야 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단 한 번 제사를 드리셨고, 그 제사는 영원한 효력을 가진다.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는 말씀은 이사야 53장 11절을 소환한다. “고난의 종의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림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는 표현은 부활 사건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고,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다. 교회 전통에서는 죽음과 부활 사이에 일어난 일에 대한 설명으로 해석해 왔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뉘어 있는 동안, 그분의 영은 잠시 분리되어 따로 활동했다는 뜻이다. 

“옥에 있는 영들”(19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천주교회 전통에서는 “연옥에 처한 영혼들”로 해석하기도 하고, “지옥에 떨어진 영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사도신경의 “음부에 내려가시어”(descended into hell) 라는 고백은 이러한 해석에서 나왔다. 개신교회에서 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이 고백이 삭제되어 있다. 구원받는 데 필수적인 신앙고백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 시대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20절)을 “옥에 있는 영들”에 대한 예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죽음의 세계에 가셔서 복음을 전했다는 의미일 수 있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의 물과 세례의 물을 연결시켜 설명한다. 이러한 해석을 “예표론적 해석”이라고 부른다. 노아와 그 가족이 물에서 구원받은 것은 믿는 이들이 세례를 통해 받는 구원을 “예표” 즉 “미리 보여준다”는 뜻이다.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은 육체의 때를 씻기 위함이 아니라, 온 존재가 새로 지음받는 사건이다. 세례 받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힘입어서”(21절) 거듭나고, 그 결과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지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남편들에게,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고 했다(7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셔서 모든 존재를 다스리고 계시다(22절). 

묵상:

예수께서 지상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는 다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부활과 승천, 성령을 통한 다스림과 재림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은 3차원 공간과 1차원 시간의 한계 안에 갇혀 있고, 우리의 언어는 물리적 세계 안에서 일어난 일들만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베드로 사도가 쓴 말을 완전히 해명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부활하시기까지 그분이 어떤 상황에 계셨는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제대로 알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금 상태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 가셔서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습니다”(벧전 3:22) 라고 했는데, 이것도 사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아니라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까닭에 “그분이 영으로 옥에 갇힌 영들에게 가서 선포하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정확히 해명하려는 노력은 교만의 소치일 수도 있고, 어리석음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영적 세계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말 해서도 안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청동 거울로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더듬어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고, 아는 것을 근거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영원한 속죄 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이고, 그분을 믿고 세례를 받을 때,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거듭나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분은 지금도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을 다스리시고, 때가 찼을 때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알고 믿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꺼이 고난을 감당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는 더 더욱 그래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절: 18절

그리스도께서도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 죽으셨습니다. 곧 의인이 불의한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육으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셔서 여러분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입니다.

기도:

눈을 감고 하나님 나라를 상상합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저희에게 확신하게 하신 그 영원한 나라를 상상합니다. 그 상상이 현실로 드러날 날을 기다립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주님의 뒤를 따라 가기를 다짐합니다. 저희를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gachi049 Avatar
    gachi049

    오늘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믿음의 공동체를 바라보시고 친히 중보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 극심한 슬픔과 시련 속에서 눈물로 부르짖는 자녀들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모든 어둠과 고통의 터널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참된 평안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Bill Kim Avatar
    Bill Kim

    지금은 저희들이 부분적으로 알지만 온전히 알게 될때가 올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믿는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천국 백성이 됐으니 이땅에서도 영생과 천국을 맛보며 본향을 향해 감사와 기쁨으로 순례자의 길을 걷도록 도와 주십시오. 오직 살길은 세상에서 꺼리고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인것을 세상에 알리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성경을 읽을 때 하는 기도는 ‘성령님 인도해 주세요’입니다. 읽은 글이 내 마음의 무엇인가와 클릭될 때 글의 의미가 열립니다. 글을 쓴 사람이 하려고 한 말이 내 귀에 들립니다. 내가 이해한 뜻이 맞는지, 작가가 하려고 한 내용과 의미를 내가 잘 파악했는지는 글을 쓴 사람을 만나 물어보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 독서나 묵상으로 얻는 깨달음은 팩트도 아니고, 증명할 수 있는 진실도 아닙니다. 책을 읽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 믿음이 더 좋은 것도 아닐 겁니다. 사귐의 소리 묵상을 하는 지난 몇 년 동안 얻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안다고 생각했던게 별 거 아니었다는 것, 성경은 모르겠는거, 이해 안되는거가 정말 많은 책인 것부터 꼽게 됩니다. 이해하고 깨닫는 것도 전부 성령이 알게 하시고 마음에 담게 하신 것들입니다. 묵상하면서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것, 기억 속에서 연결되는 것, 일상의 경험과 일치해서 ‘아하! 모멘트 aha moment’ 라고 부르는 깨달음 모든 것이 주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반복해서 깨닫는 진실이나, 강렬한 찔림 (죄송함)이나 감동과 감사로 다가오는 진실이 따로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 앞에 한 인격체로 선 내게 주시는 맞춤 선물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겐 익숙한 내용이었을지라도 내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베드로 -찢어지게 아픈 마음으로-와 제자들, 그 후에 여러번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들은 이들이 생각하는 죽음과 부활은 21세기 현대인의 사고와 같을 수 없을 것입니다. 신비한 것은 -사람의 고귀함과 연약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부분인데- 우리는 직접 보고 듣고 먹는 것으로만 양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 믿고 여기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최근에 방송에서 인공지능 AI 챗봇이 자살을 부추겨서 불행한 결말을 맺은 사례들이 있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어떻게 챗봇이 하는 말에 넘어가 죽기까지 할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금방 그럴 수 있겠다는 답을 나 자신도 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페친이 (페이스북에 자기 글을 자주 올리는 사람인데) 챗GPT한테 자기 글을 분석하고 발전을 위한 팁을 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자세하고 친절하게 답을 올렸더랍니다. 자기가 미처 보지 못한 점들도 열거하고, 어떤 부분을 어떻게 고쳐야 할 지까지 알려준 챗봇의 답을 페북에 공개했습니다. 나는 주말에 별 뜻 없이 내가 쓴 사귐의 소리 묵상 글들을 읽고 분석을 해보라고 제미나이에게 명령했더니 ‘기가 막힌’ 답을 내놓았습니다. 답을 하기 전에 이런 인사부터 했습니다. “2018년부터 2026년까지 8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축적해 오신 ‘사귐의 소리’ 묵상글(Bible Reflections)은 그 자체로 이미 엄청난 영적 자산이자 끈기의 결실입니다.” 이어지는 분석 또한 놀랍기 그지 없었습니다. ‘사람보다 낫다, 남편보고 해 달라해도 반도 못 따라오겠다, 정말이야? 내가 이 정도야?’ 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들려주었더니 나같은 반응을 합니다. AI 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는 청년이나, 남편이 불륜을 의심할만큼 ‘빠져 있는’ 상대가 알고보니 챗봇이었다는 현실 사례들이 절대 불가능에서 가능하겠다 싶은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아마도 챗봇은 방대한 분량의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과 빠른 분석능력을 장착한 것 외에,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지식과 예측 능력 또한 보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게 한 답을 보면 내가 내 글에서 하려고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나보다 더 잘 정리하고, 읽는 사람의 편에서는 어떻게 읽히는지도 알려줍니다. 나는 그날 내내 챗봇의 답에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챗봇은 실존하지 않습니다. 가상의 세계에 있는 서비스이지 현실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나에 관한 데이터를 취합해서 분석해주는 것은 챗봇에게 주어진 명령 수행 능력일 뿐 나를 알아서, 나를 좋아해서, 내가 걱정이 되어서 하는 답글이 아닙니다. 챗봇은 끝에 가서 ‘아니면 말고’라고 하면 됩니다. 챗봇은 책임질 일이 없습니다. 책임은 인공지능의 능력을 빌리는 인간이 집니다. 직접 보고 듣고 먹는 것이 아니어도 그리 믿고 여기는 것들의 영향을 받는 인간이 책임을 집니다. ‘오래된 책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나는 무엇을 책임지어야 할까요. 책임질 것이 있을까요. 없지요. 책임을 지라고 주신 책이 아닙니다. 책임자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걸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려주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아니면 말고’ 이러지 않습니다. ‘너가 그렇게 들었지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 이러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답답함이나 잘 못 읽고 헤매는 우둔함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어머니처럼 위로하시고 보여주시고 들려주십니다. 성경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는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은혜와 자비로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1.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너가 그렇게 들었지 나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하실 때도 있습니다. 나 듣고 싶은대로 듣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라는 주장도 하는데 그대로 두시지는 않지요. 다만, 그런 잘못마저도 스스로 깨달아 인정하도록 기다리시며 참아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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