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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마지막이 어떠하겠습니까?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으면, 경건하지 않은 자와 죄인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해설:
“시련의 불길”(12절)은 정도 이상의 극심한 고난을 가리킨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시험하려고” 그런 시련을 주신다고 말한다. “시험”은 개역개정처럼 “연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하나님의 뜻은 괴롭히는 데 있지 않고 믿음을 정화하고 강화하려는 데 있다. “놀라지 마십시오”는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사도는 여기서 헬라어로 언어유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을 당연히 여길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13절) 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그것은 제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다.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는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했으니,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 날에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14절)라고 덧붙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모욕과 손해와 박해를 당하게 된다. 그 고난을 기쁘게 견뎌낼 때,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믿는 이들 위에 머물러 계신다. 고난은 힘겨운 일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다. 그래서 “복이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고난 자체를 미화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절도, 악행 혹은 간섭 같은 일로 고난을 당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한다(15절).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거룩하고 의롭게 산 결과를 의미한다. 그럴 때면 사도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역설이 숨어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안디옥 주민들이 믿는 이들을 조롱하기 위해 부른 말이었다(행 11:26). “도리어 그 이름으로”라는 말은 “조롱으로 부르는 그 이름으로” 라는 뜻이다. 그것을 조롱으로 받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받으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16절)는 말로써 베드로 사도는, 믿는 이들이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심판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 믿는 이들을 고난으로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믿는 이들에게 고난이 임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믿는 이들이 고난을 당해야 한다면, 믿지 않는 이들이 당할 고난은 더욱 심할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사도는 잠언 11장 31절을 인용한다. “의인이 겨우 구원 받는다”는 말은 믿는 이들의 고난을 두고 하는 말이다.
결론으로서,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사람”(19절)에게, “선한 일을 하면서 자기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맡기십시오” 라고 권한다. 하나님을 “조물주”라고 표현한 이유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그분은 “신실하신” 분이다.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니라 약속을 틀림없이 지키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분의 뜻을 따라 선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묵상:
안디옥 주민들이 예수라는 유대인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이 오늘날까지 우리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헬라어 ‘크리스티아노스’는 ‘크리스토스’와 ‘이아노스’가 합하여 만들어진 말입니다.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대한 헬라어 번역입니다. 이 명사는 동사 ‘크리오’(”기름을 붓다“)에서 나왔으니, ‘크리스토스’는 히브리어 ‘메시아’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 됩니다. 접미사 ‘이아노스’는 “…에게 속한 사람” 혹은 “…를 따르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크리스티아노스’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 혹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크리스티아노스’는 원래 멸칭이었습니다. 18세기에 영국에서 존 웨슬리의 추종자들을 ‘메소디스트’(“규칙을 따르는 사람”)라는 멸칭으로 부른 것과 같습니다. 멸칭으로 불리는 것은 소외감과 수치심을 유발시킵니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 자체가 큰 두려움입니다. 심리적으로 그런 압박을 받고, 사회적으로 집단 따돌림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려는 유혹과 믿음을 버리려는 유혹에 흔들리는 이유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정상적인” 일이라고 말합니다. 죄를 범하여 고난을 받는다면 부끄러워 할 일이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제대로 믿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속하시는 일에 참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덧없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구원 계획에 사용된다는 것은 더 없는 영예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때, 성령께서 더욱 가까이 함께 하십니다. 믿는 이들에게 성령은 내주하시고 일하십니다만, 고난을 당할 때는 더 친밀하게 가까이 하십니다. 고난을 겪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알면 괴로움이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산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 기뻐 뛰며 즐거워 할 것입니다. 믿는 이들은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비하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티아노스’가 된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그 이름을 자랑합니다. 세상은 무지하여 그 이름을 멸칭으로 부르지만,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요절: 12절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기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그것이 저희의 정체성이고, 그것이 저희의 영예입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저희를 도우셔서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시고, 성령께서 가까이 하심을 누리며 살게 해주십시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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