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 3-11절: 열심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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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그의 권능으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해 주신 분이십니다. 그는 이 영광과 덕으로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이 약속들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세상에서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열성을 다하여 여러분의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도록 하십시오. 이런 것들이 여러분에게 갖추어지고, 또 넉넉해지면,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거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못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것입니다.

해설:

2절에서 사도는 하나님에 대한 “앎”(‘에피그노시스’)이 은혜와 평화의 원천이라고 했는데, 3절에서는 “생명과 경건”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생명”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고, “경건”은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온전한 삶을 의미한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의 사귐 안에 살아갈 때(“앎”),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그의 권능”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의 초월적인 능력” 혹은 “그의 신적 능력”이 된다. 하나님이 믿는 이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그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영광”은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키고, “덕”은 그분의 성품을 가리킨다. 그분을 알면 그분의 광휘에 매료되고 그분의 성품에 감동한다.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약속”(4절)은 인류를 죄에 내버려두지 않고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가리킨다. 복수(“약속들”)로 표현한 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마지막 예언자까지 여러 번 약속해 주셨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되는” 상태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사도는 그러한 구원에 대한 약속이 그분의 “영광과 덕”에서 나왔으며, 그렇기에 “귀중하고 아주 위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도는 신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구원을 이미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구원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계속하여 “생명과 경건”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여러분은 열심을 다하여”(5절) 라는 번역은 원문에 담겨 있는 강세를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열심을 모두 모아 힘쓰라”는 의미다. 구원받은 사람답게 사는 일에 전력투구하라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 믿음에 “덕”을 더하라고 한다. 헬라어 ‘아레테’는 한 사람을 고결하게 만드는 인격 혹은 성품을 가리킨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마땅히 인격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한다.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의미한다. 믿음 안에서 성장한다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간다는 뜻이다. 

“절제”(6절)는 욕망을 적절히 제어하여 성령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따르는 능력을 가리킨다. “인내”는 역경에 흔들리지 않고 같은 길을 가는 능력이다. “경건”은 3절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신앙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습관을 가리킨다. 

“형제우애”(7절)는 ‘필라델피아’의 번역으로서,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을 가리킨다. “사랑”은 ‘아가페’의 번역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신적 사랑이다. 인간적인 사랑(‘필라델피아’)을 실천하는 것은 신적 사랑(‘아가페’)의 능력을 얻게 한다. 아가페 사랑은 모든 믿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얻어야 하는 능력이다. 

믿음 이후에 일곱 개의 덕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연결하는 방식은 ‘소리테스’라는 헬라적 수사법이다. 여기서 베드로가 강조하려는 것은 “생명과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전인격적인 변화가 일어나도록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울 사도는 이런 것들을 “성령의 열매”(갈 5:22-23)라고 불렀다. 베드로 사도는 이런 것들이 “갖추어 지고, 또 넉넉해지는”(8절) 것을 목적 삼으라고 말한다. “갖추어 지는 것”은 “빠진 것 없음”을 의미하고, “넉넉해지는 것”은 “충만해짐”을 의미한다. 

그렇게 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열심을 내고 많은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더 깊은 “앎”으로 나아가게 한다. 반면,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9절) 즉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근시안이거나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근시안”은 영적 세계를 보지 못하고 현실 세계만을 보는 것을 가리킨다. 그렇게 될 때 일어나는 가장 치명적인 사건은 “자기의 옛 죄가 깨끗하여졌음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구원받은 감격을 망각한다는 뜻이다.

사도는 3절에서 준 명령을 다시 강조한다.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10절)은 그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시고, 부름에 응답한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부르심에 응답할 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는 사람이 된다. 

그것을 “굳게하라”는 말은 뿌리를 깊게 내리도록 만들라는 뜻이다. 그럴 때 어떤 시련에도,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럴 때 “우리의 주님이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11절)을 넉넉히 얻는다.

묵상:

베드로 사도는 믿음 안에서 “이미” 거듭난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함으로 우리는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상태로 새로 지어집니다. 영적인 출생은 육신적인 출생과 유사합니다. 태어나면서 즉시 성인이 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영적 유아로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갓 태어난 신생아는 각별하고 지속적인 돌봄이 필요합니다. 신생아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건 없이 먹여 주고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 자라면 아기는 뒤집기도 하고, 기어다니기도 하고, 일어나 걷기도 합니다. 어른이 볼 때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아기에게는 전력투구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라나 온전한 성인이 되기까지 아이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 역할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즐기지 못합니다. 

영적 신생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생명과 경건”의 선물을 받은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 때문입니다. 영적 신생아는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형제자매들의 사랑의 돌봄에 의지하여 자라갑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의지하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수준에 맞는 ‘성장에의 노력’을 지속해야 합니다. 경건에 있어서 꾸준히 성장해야만, 이미 얻은 구원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자라는 노력을 중단하면, 이미 얻은 은혜까지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럴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이미 얻은 구원의 은혜를 굳게 잡으라고 말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전심전력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삶의 전 영역에서 열매를 맺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그럴 때, 처음 얻은 은혜가 지속될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충분히 갖출 수 있습니다. “겨우” 구원받는 사람이 아니라 “넉넉히” 구원받는 사람이 됩니다.

요절: 10절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더욱 더 힘써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과 택하심을 받은 것을 굳게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

“겨우” 믿음을 지키고 사는 단계에서 “넉넉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저희를 이끌어주십시오. “겨우” 구원받는 단계에서 “넉넉히” 구원받는 단계로 나아가게 해주십시오.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경건의 삶을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간밤에는 폭우가 계속된 듯 길게 하염없이 이어는 빗소리에 무서움까지 느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짓말처럼 비는 그치고 물을 품은 대지의 내음이 진하네요. 때로 폭풍과 파도가 무섭게 일어도 때가 지나면 다 지나가게 하신 이를 찬양.

    오늘의 본문 (벧후1:3-11)은 짧지만 난해하고 심오해서 숨을 고르며 느리게 공부해 봅니다. 두 가지의 키워드가 있다고 하네요. “신의 성품” (godly nature)에 참여. 그리고 “덕의 계단” (the ladder of virtue).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 부터 끊어졌던 우리. 대속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지요 (요한 복음의 영생). 그러므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변화 되었고 (달걀 -> 병아리), 우리는 아버지의 성품 곧 그의 신성 (=godliness)에 참여할 권리와 책임을 갖게 됩니다. 아기가 자라 소년이 되고 어른이 되듯, 아버지의 성품 안에 자라가며 덕의 계단 즉 성품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지요.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곧 아가페 사랑에 이를 때까지.

    이제 곧 하루를 시작해야 합니다. 휴가 후 첫 출근하는 날. 마음이 좀 술렁거려요.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오는 밤, 머리 위에 견고한 지붕이 있어서 감사. 때가 되면 비가 개이도록 하신 섭리에도 감사. 마음 속 간절한 기도들도 때에 맞게 반드시 응답하실 분, 아버지의 선하심과 완전한 사랑을 신뢰하고 찬송하는 오늘이 되기를.

    소년은 아기로 돌아가지 못하고 어른은 아이로 되돌아가지 못함을 깨닫고 내 안에 이미 일어난, 그리고 그동안 있어왔던 내 존재의 변화를 붙잡고 더 높은 곳, 아버지의 성품 그 아가페의 사랑의 계단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나날, 그런 인생이 되었으면.

  2. Bill Kim Avatar
    Bill Kim

    주님의 십자가를 깨닫고 주님응 나의 구세주로 영접 했을때가 반세기도 넘었습니다, 세상이 청결하게 보였고 기쁘고 즐거웠던 일상이 모르는 사이에 무덤덤 해지는 실정입니다. 다시한번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낳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라“ 는 말씀을 읊조리며 사랑에 빚진자로 주님과 이웃에 사랑을 갚으며 열심히 살기를 원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앞에 설때까지—- 아멘.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십자화”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누가 쓴 시인지 불분명합니다만 가슴이 어디에 부딪힌 것 같았습니다.

    “너는 자라서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어느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는데 “너는 자라서 내가 되겠지 과연 내가 되겠지” 오늘 별세한 아버지는 나직이 축복하셨어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자신보다 나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겁니다. 시대와 역사가 어떠하든, 현실의 무게가 어떠하든,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이 시는 ‘오늘 별세한’ 어느 아버지의 아들이겠지요. 그는 어느 소설가가 자기의 아들이 자라 ‘겨우’ 자기 밖에 되지 않겠구나 라고 했지만 자신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너는 ‘과연’ 아버지 자신이 꿈꾸던 멋진 사람이될 거라고 축복했다는 시입니다. 그렇게 읽었습니다. ‘겨우’와 ‘과연’의 거리가 하늘과 땅만큼 크게 느껴집니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전심전력으로 살라고 당부합니다. ‘과연’ 내가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복을 비는 시 속의 아버지 마음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되어지는 모습이 우리 육신의 아버지 이상이라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벅차게도 합니다. 기대에 못미치는 자식을 보며 ‘겨우’ 이것 밖에…한숨을 쉬는 것도 아버지이고, 도와주고 해 준 것 없는데 어느새 저만치 앞서 걷는 자식을 보며 기뻐하는 것도 아버지입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는 우리의 일생 속에 꽃처럼 피고 지는 순리입니다. 신앙의 여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신앙의 길에서는 -십자가의 길, 예수의 길 위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없어집니다. 시 속의 너와 나도 없어집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정욕의 나와 은혜의 나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사람으로서 꾸준히 성장하는 것입니다. 겨우가 아니라 넉넉히 사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딸이 되는 겁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4. gachi049 Avatar
    gachi049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백성이 되어 살게 하신 그 은혜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주님, 여전히 저의 영적 수준은 어린아이와 같이 미숙함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공급해 주시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허락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주시는 영의 양식을 먹고 영과 육이 더욱 강건해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늘 동행하시고 도와주옵소서.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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