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장 12-15절: 믿음의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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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그러므로 비록 여러분이 이런 것들을 알고 있고, 또 받은 진리에 굳게 서 있지만, 나는 언제나 이런 것들을 두고서 여러분을 일깨우려 합니다. 나는, 이 육신의 장막에 사는 동안,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서 분발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대로, 내가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멀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언제든지 여러분이 이런 일들을 기억할 수 있게 하려고 힘을 쓰고 있습니다.

해설:

“이런 것들”은 3-11절에서 언급한 내용, 즉 “생명과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영적 성장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진리를 가리킨다. 베드로 사도는 독자들이 그 “진리”를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위에 굳게 서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12절).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쉽게 망각되기 때문에 계속하여 “일깨워야” 한다. 현재 부정사를 사용한 것은 일깨우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도는 자신의 죽음이 멀지 않다고 믿고 있다. “우리 주 예수께서 보여주신 대로”(14절) 라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사도는 곧 순교당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은 것 같다. “육신의 장막에 사는 동안”(13절, 14절) 이라는 표현은 지상의 삶이 일시적이고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영원하다는 믿음을 반영한다. 사도는 신도들을 섬길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이 조급하다. 

그것이 사도가 이 글을 쓴 이유다. 살아 있는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일깨워 열정을 회복시키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15절) 글자를 통해 그 일을 지속할 수 있기를 원했다.

묵상: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자주 그 말을 하거나 그 글을 쓴 사람을 상상해 봅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글이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문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신도들의 믿음을 일깨워 “생명과 경건에 이르도록” 돕기 위해 이 편지를 썼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삼 년 동안 동고동락했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삼십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온갖 고난을 당해 가며 복음을 전했던 베드로의 숨결이 느껴집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읽으면 한마디 한마디를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잠시 동안 “육신의 장막”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땅에서 자신은 나그네요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하나님에게서 얻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환난과 박해 중에 살고 있는 신도들을 격려하는 일에 마음을 씁니다. 그 자신이 겪어 본 일이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 믿음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전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기를 바라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읽습니다. 사도의 소망대로, 우리가  온전한 믿음 위에 서 있기를 힘쓰며 우리의 소망을 알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말해 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요절: 13절

나는, 이 육신의 장막에 사는 동안, 여러분의 기억을 일깨워서 분발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기도:

이 보배로운 믿음이 2천 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 저희에게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 연결고리 끝에 사도들이 있고, 그 앞에 주님이 계심을 또한 생각합니다. 이 믿음으로 저희가 주님과 연결되고, 주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또한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이 믿음이 저희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도록, 주님,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gachi049 Avatar
    gachi049

    세상의 그 어느 보화와도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이 땅에서 육신의 장막을 벗어날 날을 바라보며, 남은 생이 지나온 세월보다 짧은 이때에 더욱 하나님 자녀답게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과 기도를 통해 어떤 환난과 핍박이 오더라도 진리 안에 굳건하게 서게 하옵소서. 나아가 이웃에게 그 진리를 전하며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늘 동행하시고 도와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밤에 또 비가 내렸나요? 짙은 운무 사이로 맑은 새소리가 들리는 아침, 수요일입니다.

    성경(벧후 1:12-15) 본문을 여러번 읽어봅니다. 죽음이 임박한 저자가 자신의 사명 (진리를 기억하게 하는 것)과 유언 (진리를 언제나 기억하는 것)을 짧게 적은 매우 개인적 느낌의 비감한 문장들. 정말 베드로 사도의 글(ESV 성경주석)이었을 수도, 아니면 베드로 전통에 속한 가명 저자들의 문학적 투사 기법(Copilot)일 수도 있겠지요?

    기억의 의미에 대해 잠시 생각해 봅니다. 금붕어는 부족한 뇌의 기억용량 때문에 방금 전에 뭘 먹었다는 것도 계속 잊어버린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기억하기 때문에 과거는 현재라는 삶의 집을 짓는 재료가 되고, 내일을 향한 여행도 어떤 방향이 있을 수 있겠죠?

    기억하기 때문에 가족과 친구가 존재할 수 있고 “우리”라는 것도 있을 수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주님은 “나를 기억하며(여) 이것을 행하라” (Do this in remembrance of me)고 당부하신 것 아닐지? 육체의 장막에 머무는 동안 (as long as I am in this tabernacle).

    또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간밤에도 그럭저럭 잠을 잘 수 있어서. 꿈에서 깨어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있어서. 향기로운 커피와 빵을 먹을 수 있어서. 자주 실망이 오지만 소망의 이유를 기억하고 있어서. 주를 기억할 수 있어서. 감사해요.

    에벤에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도움 (에제르)인 것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주를 기억하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매일, 그런 인생 주시길.

  3. Bill Kim Avatar

    오늘의 말씀이 저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주님앞에 설날이 곧 오는것을 압니다, 자녀 들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role model 이 되어야 하는데 말과 삶이 다른 삶을 살아온 위선자 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열려있는 십자가 은혜의 문에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드립니다. 비록 얼마남지 않은 인생이지만 적어도 자녀들에게 믿음의 유산을 전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도와 주십시오,
    말과 삶이 같은 삶을 살아내면서, 마지막 숨쉴때 까지—-아멘, 아멘, 아멘.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세월의 흐름이 무정하고 아쉽게 느껴질 때에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굳이 네이티브 인디언 격언을 꺼내지 않아도, 달리다 잠시 쉬어야 또 달릴 수 있습니다. 앞뒤 살필 틈없이 냅다 달릴 때는 설령 앞만 ‘보고’ 달린다해도 정말 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수지가 있습니다. 산 중턱에 만든 인공저수지인데 남편과 아들 따라 몇 번 걸었던 코스입니다. 몇 주 전에 갔다가 무서운 경험을 하는 바람에 당분간 다시 못가고 있습니다. 저수지라서 둥그런 루프형 코스인데 내 걸음으로 60분, 65분 정도 걸립니다. 그날 남편과 아들이랑 같이 나갔는데 아들은 강도 있는 운동을 하겠다며 50파운드 중량조끼 weight vest를 갖고 갔습니다. 나 때문에 처지거나 늦어지지 않도록 오늘은 좀 빨리 걷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아들이 중량조끼를 입고 걸으면 평소 속도처럼 못 걷는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요. 차를 주차하자마자 ‘총알처럼’ 나와 아주 빠른 속도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들과 남편보다 빨리 시작해야 맞출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빠르게 걸었습니다. 둘이 어디쯤 따라 왔는지 뒤도 안 보고 걸었습니다. 저수지에서 나가니 한쪽은 산 위의 주택가로 가는 길이고, 다른 쪽은 차량 도로입니다. 찻길 옆에 난 길로 걸었습니다. 교회 아는 커플과 같이 왔던 코스인데 아무리 가도 그 길이 아닌겁니다. 산속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닌데 저수지가 한참 밑으로 내려다 보입니다. 차들은 다니지만 나처럼 걷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아직도 저수지를 걷고 있답니다. 폰으로 내가 있는 로케이션을 찍어 보라는데 산중턱 어딘가로 나올 뿐 계속 가면 주차했던 데가 나오는건지 알 수 없었습니다. 무서워졌습니다. 패닉까지는 아니지만 -차도 다니고, 아침 시간이고 폰도 있으니 무서워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무서웠습니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 계속 걸었습니다. 익숙한 길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차가 보입니다. 남편과 아들은 15분쯤 뒤에 왔습니다. 어디로 나왔는데 그렇게 헤맸느냐고 난리입니다. 잘못 갈 데가 없는 코스인데 왜 무서워했느냐고 신기해 합니다. 저수지는 루프형이라 시작과 종점이 반대입니다. 교회 친구와 걸었을 때는 이 날과 반대로 걸었습니다. 그 때 들어간 문은 이번에 나온 문이고, 이번에는 그 때 다 걷고 나온 문이었습니다. 공간개념이 턱없이 부족한 내게는 같은 코스라도 반대로 걸으면 완전히 다른 코스가 된 거였습니다. ‘앞만 보고’ 걸었기 때문입니다. 평소보다 빨리 걷겠다는 생각만 하고, 조끼를 입고 걷는 아들 속도는 아예 잊어버리고 나만 혼자 정말 열심히 걸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지상에서의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걸어갈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걸 직감합니다. 나이가 든 지금 읽으니 그의 예감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는 안 보이던 것, 앞만 보고 걸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이 지금은 보입니다. 시력이 약해졌지만 때론 더 잘, 더 자세히, 더 밝게 보이기도 합니다. 친구와 대화하느라 저수지 문까지 15분쯤 걸어간 걸 몰랐습니다. 그 15분 분량의 이야기 속 세계가 저수지 주변 풍경을 잠식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우리가 붙들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나를 봅니다. 부족하고 허망하고 실망스러운 자신을 봅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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