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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만은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 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녹아버리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일은 드러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녹아버릴 터인데,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8절)는 시편 90편 4절(“주님 앞에서는 천년도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습니다”)을 생각나게 한다. “하루” 혹은 “천 년”은 우리가 경험하는 일차원의 시간 개념이다. 시간의 한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것이 큰 차이이지만, 영원의 차원에서는 순간일 수 있다. 이것은 4절에서 언급한, 조롱하는 이들의 질문(“재림이 왜 늦어지느냐?”)에 대한 대답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일에 느리다”는 생각을 한다. 베드로 사도는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답하면서, 만일 하나님이 재림의 날을 미루고 계시다면,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의 구원을 위해 “오래 참으시는”(9절)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의 날”(10절)은 “재림의 날”을 가리킨다. 그 날이 “도둑같이 온다”는 말은 “예상하지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온다”는 뜻이다. 예수님도 당신의 재림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셨다(마 24:43). 예언자 하박국도 주님의 날이 늦어지는 것 같아도 반드시 올 것이라고 했다(합 2:3). 그 날에는 우주적인 대격변이 일어나고, 모든 것이 정화되며, 숨겨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다(11절). 11절에 사용된 묘사들은 비유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은 지금 우리로서는 표현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는 “도둑같이” 임할 그 날에 대한 가장 좋은 준비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살 때, 언제 재림이 일어나도 당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날을 앞당긴다”(12절)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 날”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류와의 관계 속에서 정하신다.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하는 것”은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믿는 이들이라면 이 땅의 불의와 부패를 견디면서 “마라나타”(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소망해야 한다. 예수께서 이끌어 오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정의가 깃들여 있는”(13절) 곳이기 때문이다. “정의”라는 번역보다는 “의”라는 번역이 더 낫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의가 완전히 다스리는 곳이다.
묵상:
“재림의 지연”은 초기 신도들에게 큰 문제였습니다. 사도들 중에도 다수가 자신들의 생애 안에 예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기대했으니, 그들에게 영향 받은 신도들은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은 모두가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볼 것으로 기대했다가 교우들 중에 세상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자,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에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는 사람과 그 이전에 죽은 사람은 아무 차이가 없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일 뿐, 육신적으로 살았느냐 죽었느냐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재림의 지연”을 조롱거리로 삼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말합니다. 이 편지가 쓰여진 것이 부활 승천 후 적어도 삼십 년이 지났을 때이니, 믿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조롱하기에 딱 좋은 구실이 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부활 승천 후 십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도 재림 지연으로 인해 혼란스러워했으니, 베드로후서의 독자들이 살던 시기는 더욱 그랬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시편 90편 4절과 하박국 2장 3절을 동원하여 답을 줍니다. 우리의 시간 관념과 하나님의 시간 관념은 전혀 다르고, 설사 지연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더 많은 사람의 회개를 위한 것이며, 늦어진다 해도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재림의 지연” 문제는 사도들과 초기 신도들의 조급증이 만들어낸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막 13:32)고 하셨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지금이 그 때입니까?” 하고 여쭈었을 때는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라고 답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라는 개역개정 번역이 더 좋습니다. 재림의 날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역사의 흐름 중에 정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날이 도둑처럼 임할 것이니,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로 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들과 초기 신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손해와 모욕과 혐오와 박해를 겪어야 했고, 때로 순교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살았기에 그들은 주님의 재림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소망했고, 그 소망은 “속히 오시리라”는 선포로 이어졌습니다. 그러한 영적 조급증이 “재림의 지연”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냈고, 그로 인해 믿는 이들은 혼란을 겪었고,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 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이들은 기독교 교리에서 재림을 제거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건을 부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재림의 문제에 대한 바른 태도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 날이 속히 임하기를 기도하고 기다리며, 언제 그 날이 와도 주님 맞을 준비가 되어 있도록 거룩하고 의로운 행실로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때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절: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따라 정의가 깃들여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
주님,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 생각하며 하루를 소중히, 거룩히 살게 해주십시오. 저희에게는 오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 주어지는 오늘이 언제 끝날지, 주님만 아십니다. 저희의 오늘이 주님의 영원에 삼켜지는 날을 소망하며, 오늘도 신실하게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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