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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의 이름으로 된 세 편의 편지를 통틀어 ‘요한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요한복음서와 요한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합하여 ‘요한 문서’라고 부릅니다. 교회 전통에서는 요한 문서 전체가 사도 요한에 의해 쓰여졌다고 가르쳐 왔으나, 학자들은 한 사람이 썼다는 가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문체와 어휘와 시대적 상황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문서 전체가 사도 요한의 영향을 받은 공동체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별로 없습니다. 요한서신에서 저자는 자신을 “장로”라고 부르는데, 사도 요한이거나 그의 제자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요한일서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오한 문서로 인정받아 왔습니다. 하나님을 사랑으로 정의하고 사랑의 실천을 요청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부정하는 이단을 조심하라는 권고도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신앙 양상을 파악하는 데 유익한 자료가 됩니다.
요한이서는 거짓 교사에게 기회를 주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고, 요한삼서는 가이오에게 주는 몇 가지 지침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1-4절: 더 깊은 사귐으로
본문:
이 글은 생명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이 생명의 말씀은 태초부터 계신 것이요, 우리가 들은 것이요, 우리가 눈으로 본 것이요, 우리가 지켜본 것이요, 우리가 손으로 만져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에게 증언하고 선포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우리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해설:
이 글은 ‘편지’로 분류되어 있지만 전형적인 편지 형식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저자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는다. 저자는 자신의 글이 “생명의 말씀”(1절)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18절과 연결된다. “생명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분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다. 저자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복수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한다. 그는 개인 자격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공동체의 대표자로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저자는 자신들이 생명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지켜보고”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말한다. 태초부터 계셨던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이다(2절). 이 표현 때문에 저자를 사도 중 한 사람으로 추정한다. 저자가 사도 중 한 사람이라면 사도 요한이 틀림없다.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는 어휘와 사상에 있어서 매우 닮았기 때문이다.
2절은 요한복음 1장 14절과 연결된다. 영원하신 생명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당신의 존재를 오감으로 확인시켜 주셨다.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만진 그분을 “증언하고 선포한다.” “증언”은 본 그대로의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고, “선포”는 그 사실의 의미를 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3절) 즉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우리” 즉 증인들과 “사귐을 가지기 바라는” 까닭이다. “사귐”은 헬라어 ‘코이노니아’의 번역으로서, 인격적이고 지속적인 깊은 소통을 의미한다. 그런 사귐은 변화를 만들어낸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이 서로 친밀하게 소통하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을 믿는 이들도 서로 친밀하게 소통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서로의 기쁨이 차고 넘치게”(4절) 될 것이다. 사귐을 통해 진리와 사랑과 은혜가 퍼져 나가기 때문이다.
묵상:
기독교는 단일신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신을 믿습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시며, 각각 서로 달리 일하시지만 그 모든 일은 같은 결과를 만들어낸다고 믿습니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 안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후대 교회에서 만든 말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존재 상태와 활동 방식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교리의 중심에는 나사렛 출신의 유다 청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고백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인정하면, 그 논리적 결론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셋이면서 하나”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사랑의 사귐” 때문입니다.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삶의 모든 영역을 공유하며 소통하는 친밀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세 위격의 하나님은 완전한 수준의 사귐 안에 거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분이면서 한 분이고, 한 분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 분입니다. “이심전심” 혹은 “부부 일심동체”라는 표현은 인간적인 차원에서 경험하는 수준 높은 사귐을 표현한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귐도 때로 이런 수준에 이를 수 있다면, 하나님의 차원에서 나누는 사귐은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태초에 사귐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완전한 사귐 안에 거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사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와 모든 생명의 창조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는 사랑의 행위였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다는 말은 사랑하는 존재로 지으셨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존재로 지으셨기에 사귐은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첫 사람의 죄는 온전한 사귐을 깨뜨렸습니다.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아담은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창 2:23)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죄를 범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고, 불순종에 대해 질책하는 하나님 앞에서 하와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죄로 인해 사랑이 깨지고 사귐이 무너졌으며, 그로 인해 인간의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사랑의 능력을 회복하고 온전한 사귐을 누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있었던 사랑과 사귐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사귐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있었고, 그 사귐은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친밀한 사귐을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읽는 (혹은 듣는) 이들도 자신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을 누리고, 그 사귐을 통해 믿는 이들과의 사귐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요절: 3절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기도:
저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귐 안에 들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전에 거하는 한 시간이 세상에서의 천 년보다 더 좋다는 다윗의 고백을 기억합니다. 주님과의 사귐을 소중히 여기고 더 가까이 하게 해 주십시오. 그 사귐의 능력으로 더 많은 이들을 품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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