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장 1-6절: 믿는다는 것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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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쓰는 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시니, 우리 죄만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해설:

“나의 자녀 여러분”(1절)이라는 표현은, 사도가 독자들을 자신의 영적 자녀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자신이 이 편지를 쓰는 의도가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죄를 전혀 짓지 않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앞에서 사도는 거듭난 사람도 죄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도록”이라는 말은 “죄에 넘어지는 일이 줄어들도록”이라는 의미다. 

믿는 사람이 죄를 짓는 일은 실제로 일어난다. 그래서 “누가 죄를 짓더라도”라고 표현했다. 죄 짓는 일은 피할 일이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해도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파라클레토스’가 여기서도 사용되었다(요 14:16; 15:26; 16:7). 과거 성경에서 “보혜사”로 번역되었던 이 단어는 “변호사”, “대리자”, “대변자”, “위로자” 등의 의미로 쓰였다. 예수님은 “내가 가면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보혜사로서의 역할에 있어서 자신과 성령이 동일하다고 암시하셨다. 사도 요한은 여기서 보혜사로서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한다. 사도는 그분을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그분이 보혜사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실 수 있는 이유는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2절)이시기 때문이다. 헬라어 ‘힐라스모스’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사이에 쌓인 벽을 허무는 제사를 의미한다. 율법 규정에 따라 화목제물을 드리고 나면, 제사 드린 사람은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 전에 나아갈 수 있었다. 믿는 이들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를 통해 하나님 전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과의 사귐 안에 들어간 사람은 그분의 계명을 지킨다(3절). 앞에서 사도는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진리를 행한다”(1:6)고 했는데, 여기서는 “계명을 지킨다”고 말한다. “계명”은 구약의 모든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 계명” 즉 “사랑의 계명”을 말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그 속에 없다”(4절). 히브리 개념에서 “알다”는 인격적인 사귐 안에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완성”(5절)된다. 사랑은 실행을 통해 더 깊어지고 강해지는 법이다. 사랑이 강해지면 말씀에 대한 순종도 강해진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참되다면, 삶의 변화로 그 증거가 드러나야 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그 사랑이 이웃 사랑으로 표현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음을”(6절) 확인할 수 있다. 사도는 “계명을 지키는 것”과 “진리/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사는 것”이라고 풀어 쓴다. 여기에서 사용된 동사들(“지키다”, “알다”, “사랑하다”, “거한다”, “살다”)은 모두 현재형으로 사용되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속되고 반복되는 것이라는 의미다.  

묵상: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삶의 과정으로서의 믿음”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한 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 사도는 여러가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알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다’는 지속적인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이력서를 통해 아는 것은 ‘야다’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에 대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어 아는 것도 ‘야다’라 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 오랜 시간을 두고 사귐을 지속하여 아는 것이 ‘야다’입니다. 

부부가 일생 동안 사귐을 지속해도 다 알 수 없는 것이 인격체입니다. 진정한 사귐이 있다면, 그 사람의 새로운 면을 알아가게 됩니다. 그런 앎은 결코 완성되지 않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알아가기를 갈망합니다. 사람을 아는 것도 이렇다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또한 “거하는 것”입니다. “내주”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거함의 믿음”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한 인격과 한 인격이 서로 안에 거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은 서로를 자신 안에 품는 것입니다. 어떤 시인은 “내 안에 너 있다. 하지만 무겁지가 않다”고 했는데, 사랑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도 아름다운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믿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한 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랑함으로 자라게 되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믿는다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진리를 따르는 것” 혹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어떤 표현을 사용하든,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3:34)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조건부를 붙여서 “새 계명”이라고 부르십니다. 사랑에도 종류의 차이가 있고 질적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높은 사랑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사랑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같이”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절: 5절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기도:

저희의 믿음을 붙들어 주십시오. 주님께 대한 사랑으로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믿음의 길에 서서 주님을 알아가며 주님처럼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5 responses

  1.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큰 사랑을 다 따라갈 수는 없지만, 만분의 일이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되도록 작은 일부터 사랑을 실천하는 남은 여정이 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함께하여 도와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아멘!

  2. bull9707 Avatar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안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구절을 읊조리고 있습니다만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사랑을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이라고 합리화 하고 있는 위선자입니다.
    그런 위선자에게도 십자가 은혜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를 드립니다. 아멘.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구름이 짙게 끼고 습한 아침, 저녁 부터 비가 올 모양입니다. 화요일 아침. 사무실로 가는 날입니다.

    본문 (요일2:1-6)을 읽습니다.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주를 영접함으로 자녀의 권세를 얻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육체 안에 사는 동안엔 세상 가운데를 걸어야만 하지요. 자주 죄에 걸려 넘어지곤 합니다.

    정결케 하는 샘물로 나아가 매일 죄를 씻기고 주님의 성찬, 그 생명의 떡과 포도주를 먹어야 하겠지요? 그러면 하나님을 아주 조금씩 더 알게 되고, 그 지식이 이기심과 욕망 덩어리인 저를 매일 조금씩 바꿔주는 사랑의 누룩이 되지 않을까요?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희구름이 가득차있는 하늘이 왠지 서글픔과 향수를 부르는 아침. 그래도 아직 일하러 갈 곳이 있어서 감사. 편안한 처소에서 잠자고, 거뜬히 일어나 오늘, 그 생명을 또 하루 살고 있어서. 슬픔도 기쁨도 함께 나눌 가족이 있어서.

    죄의 유혹에 걸려 늘 넘어지고 늘 헤메이는 자. 보혈의 능력과 은혜를 종일토록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포도나무 되신 주의 사랑 안에 가지로 남아 거하며, 주님의 마음과 뜻, 주님의 성품과 비밀을 매일 조금 더 알아가는 나날, 그것이 나의 인생이 되었으면.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요세미티 산속에서 내려와 인터넷 연결이 되는 곳에 왔습니다. 30년 만에 다시 찾은 요세미티는 여전히 웅장하고 아름답고 조용했습니다. 우리가 묵은 숙소 lodge 는 하프돔 half-dome 바로 아래에 있는 텐트촌이었는데 편의시설이 거의 전무해 불편하긴 해도 일몰 때 하프돔에 비치는 마지막 햇빛이 명작이라 길거리에 간이 의자를 놓고 해지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꽤 많았습니다. ‘불편의 민주화’라고 불러도 될 듯, 어디서 왔든지, 직업이 뭐고 공부를 얼마나 했든지, 돈이 얼마나 있는지…아무 상관 없이 공동 세면장에 들어와 이를 닦고, 줄 서서 샤워장을 쓰고, 촘촘히 세워진 텐트 방에 들어가 옆집 말소리가 들리면 들리는대로, 영어가 아니면 어디 말일까 궁금해 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일체의 음식은 물론 비누와 치약을 포함해 (향료를 쓰니까) 모든 짐은 텐트 밖 두터운 쇠 박스에 넣어 두고 텐트 안에서는 잠만 잤습니다. 셀폰도 무용지물, 전기불도 침침하니 책 읽는 것도 잘 안되고 심심하다고 군것질을 할 수도 없는 정말 단순한 시간이었습니다. 요세미티의 주인들-공원 곳곳에 나타난다는 곰들을 비롯해 3000년 된 세코이아 나무들이 시키는대로 따르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작품 사진이 되는 곳에서 눈도 호강하고 마음도 고요해지는 복을 누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질문에 답을 찾아준 본문입니다. 20대 중반 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디에 서있는지 답을 할 수 없어 괴롭고 힘든 때가 있었습니다. 엄마를 보내고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은 막막함이 나를 옥매고 붙잡았던 때 같습니다. 그 때 방에서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은 마치 능력 있는 변호인이 있는 ‘죄인’이 가졌을 법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를 대신해 나를 설명하고 변명하고 약속하는 (앞으론 열심히 살겠습니다 재판관님!) 예수님이 내 곁에 계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요한일서의 오늘 본문이 그 때의 경험을 잘 그려줍니다. 예수님은 나의 변호인입니다. 과거에 나를 지켜주신 예수님, 오늘도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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