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2장 7-11절: 오래 된 새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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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입니다. 그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그 사람 앞에는 올무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있으니,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해설:

앞에서 “나의 자녀들아”(1절)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사랑하는 여러분”(‘아가페토이’)이라고 부른다. 사도는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수신자들을 아낀다. 그는 자신이 지금 주는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계명”이라고 말한다(7절). 그들은 이미 그 계명에 대해 들었다.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는 말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다. 

그 “옛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8절)이다. 율법의 시대가 지나고 은혜의 시대가 왔으므로 옛 계명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심으로써 이웃 사랑의 옛 계명의 의미를 혁명적으로 바꿔 주셨다. “이웃”에는 원수까지 포함되고, “사랑”은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이다.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라는 말은 “이 새 계명은 하나님의 뜻에 맞고”라는 뜻이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라는 말은 “여러분에게도 진리입니다”라는 뜻이다. 

“빛 가운데 있다”(9절)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 살고 있다면,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가령,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여기서도 역시 현재형 동사가 사용되고 있으므로, “형제자매에 대해 미움을 품고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풀어야 한다. “어둠 속에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 바깥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10절)은 “빛 가운데” 즉 하나님의 진리 안에 “머물러 있다.” “올무”는 헬라어 ‘슽칸달론’의 번역으로서, “넘어지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글의 맥락으로 볼 때 “넘어지게 하는 것”은 미워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형제자매에 대한 미움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 바깥에 머물게 한다(11절). 그것은 깜깜한 곳에서 걷는 것과 같아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진리 바깥에 머물면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진리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그것을 “어둠이 그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라는 비유로 설명한다.

묵상: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신명기 6장 4-5절의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레위기 19장 18절의 “이웃 사랑의 계명”을 지목하셨습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율법과 예언의 핵심이라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새로운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옛 계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차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8절). “어둠”의 시대는 율법의 시대를 의미하고,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율법은 완전한 것이 올 때까지 잠시 하나님의 뜻을 비추어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만, 인간의 죄성을 인정한 상태에서 주어진, 제한적이고 잠정적인 지침이었습니다.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행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환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참 빛”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 1:5)고 했습니다. 어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빛이 비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태초부터 계셨던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그 빛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과 생명을 환히 드러내셨습니다. 그로 인해 율법에 담겨 있던 하나님의 뜻이 환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계명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옛 계명이라 할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전혀 새로운 의미와 차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율법적인 사고 안에 갇혀 있을 때(어둠 속에 있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들만을 편애하는 분으로 오해했고, 자신들과 같은 혈통, 같은 종교, 같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만을 이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그들의 편협한 이해로 인해 다른 민족들에 대한 혐오와 배척과 박해를 정당화 하는 논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어둠 안에 살면서 어둠의 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모든 민족의 하나님이시며 의인과 악인 모두의 하나님이시라고 가르치셨고, 이웃의 범주에서 제외시킬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사랑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주는 것이라고 가르치심으로써, 사랑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랑의 계명은 “오래된 새 계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랑의 계명을 충직하게 따라 살다가 죽으셨습니다. 새 계명은 고매한 사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서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새 계명을 따라 죽으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그것이 진리와 생명의 길이라는 사실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요절: 8절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을 믿음으로 저희가 빛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어둠의 행실이 저희에게 남아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보다는 미움에, 용서보다는 응징에, 포용보다는 배척에 더 민첩한 저희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셔서 빛의 자녀들답게 말하고 행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새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것 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 하여야만 하느리라“ 는 구절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율법의 근본은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이기에 사랑이 주제 인것을 압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은혜는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허락하시는 우주적인 주님의 사랑인것인것을 고백합니다, 마치 율법은 촛불빛, 은혜는 태양빛으로 비교하는것이 타당할지요, 촛불로는 농사를 지울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의 빛아래서 씨를 뿌리는 신실한 농부가 되기를 원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본향에 도착할때까지—- 아멘 아멘 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간밤에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하늘에는 옅은 쪽빛이 번져나고 있습니다. 수요일 아침. 좀 일찍 잠이 깼네요.

    주어진 본문(요일2:7-11)를 읽습니다. 옛 계명, 그렇지만 새 계명. 일종의 형용모순 (oxymoron) 같네요. 목사님의 해석처럼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계명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요13:34).

    주께서 사랑하셨듯이…그러므로 형제자매에 대한 나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을 닮아야, 또 닮아가야 하겠지요? 나 자신도, 내 가족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어떻게 믿음의 형제자매들에게 완전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요? 가능하기는 한 일일까요?

    이제 또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아직도 좀 여려번 깨긴 하지만 그래도 꽤 깊게 잤습니다. 아침엔 깨어 힘차게 숨쉬고 향기로운 빵과 커피를 먹었습니다. 오늘도 살라하심을, 또 살게 하심을 감사. 함께할 가족을 주심도.

    사랑이 없는 마음. 쉽게 미움에 물드는 마음, 이 차가운 마음을 정직히 비추고 그 가장 좋은 은사를 성령께 구하는 하루가 되기를. 오래 참지 못하는 마음, 강퍅하고 교만한 마음, 자기의 유익을 좇는 마음, 무례한 마음. 이 마음들을 어찌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주님의 마음을 알고 매일 닮아갈 수 있을까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참으며 믿으며 바라며 견디는 삶. 서로 사랑함으로 사람들이 주님의 제자임을 알아보는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가요?

  3. gachi049 Avatar
    gachi049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사랑을 보여주시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명하셨으나, 저는 여전히 사랑을 표현하는 데 조심스럽고 쑥스러움이 많습니다. 주님, 제가 먼저 마음을 열고 가족들에게 “사랑한다” 고백할 수 있는 담대함과 용기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요세미티 공원에는 절벽과 폭포가 많습니다. 높다란 화강암 바위가 햇볕과 눈, 바람과 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어 깎이고 부서져 자연적인 절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명한 폭포수인 브라이덜베일 폴 Briadalveil Fall (남편은 면사포 폭포라고 부르는데)은 짧은 하이킹 코스라서 접근이 쉽습니다. 어제는 숙소에서 차로 1시간 운전해 해발 3,200 피트의 포인트까지 갔는데 요세미티의 위엄을 사방에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곳이어서 마음이 활짝 열리고 눈이 닿는 곳마다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요세미티에는 자이언트 세코이아 나무들이 빽빽합니다. 2천 5백년에서 3천년 된 나무들이라는데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한쪽은 벼랑이고 다른 한쪽은 세코이아가 빼곡합니다. 나무가 불에 타면 강한 열로 인해 껍질과 속 목재가 탄소 검은 숯으로 변하고 불이 숯까지 태우면 미네랄 가루의 재로 남아 희끗희끗하게 되기도 한다는데 그래서인지 군데군데 하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산불이 나서 나무들이 타는 일이 종종 있겠다 싶었는데 어떤 인포메이션 포스터는 자이언트 세코이아 삼림에선 정기적으로 산불이 일어나는 것이 생태계의 균형 유지에 필수적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불이 나서 새 어린 나무들의 공간이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3000년 수령의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계속 자라나는 것도 놀랍지만 수평적으로 새 나무가 자라나도록 공간을 만들어주는 화재도 일어나는 자연의 율법도 놀랍습니다. 모든 산불이 자연재해는 아닌겁니다. 파괴와 죽음이 생명의 보존과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잴 수 없는 자연의 명령이 분명히 있구나 싶습니다. 그렇게 보면, 숲속의 나무들이 서로 소통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나무의 언어가 있다는 겁니다. 있을 것 같습니다. 나무들 뿐 아니라 나무를 찾는 새들과 짐승들 사이에도 언어가 있고, 이해와 소통의 방법이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의 사랑은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의 사랑이지만, 어쩌면 나무들도, 자연 세계의 짐승들도 사랑의 명령을 따르며 사는 것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됩니다. 짐승은 본능을 따르지 이성이나 영성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새 나무의 싹이 뿌리를 내리게끔 공간이 만들어집니다. 나무한테 사랑하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창조주의 사랑이 우주에 가득하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사랑의 기운이 온 천하에 가득한 것 아닐까요. 실로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사랑의 주께서 이끌어가는 세상이지 죽음과 파괴로 가득찬 세상, 공허와 고독으로 채워진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법을 깨달아 행하는 사람으로 산다면, 찾아오는 새를 환대하는 나무 같은 사람으로 산다면, 새 싹을 위해 자기의 자리를 내어놓는 나무를 닮은 사람으로 산다면 주님의 계명으로 세상이 거듭날 수 있겠지요. 사랑이 빚는 새 세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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