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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은 모두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해설:
요한복음과 요한 서신에서 “세상”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피조 세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류를 가리키기도 하며, 하나님을 등지고 죄악에 물든 인간 사회를 가리키기도 한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할 정도로 세상을 사랑하셨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멸망의 운명에 빠진 인류를 가리킨다. 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의 세상은 하나님에게 등지고 죄악을 탐하는 인간 세상을 의미한다.
15절에서 사도 요한은 “세상”이라는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15절)라는 말의 의미는 15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은 “육체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 표현은 창세기 3장 6절을 생각나게 한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하와에게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사람을 슬기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다.” “먹음직 하다”는 말은 식욕에 대한 표현이다. 식욕뿐 아니라 성욕, 명예욕, 성취욕 등이 모두 육체의 욕망에 속한다. “눈의 욕망”은 “보암직도 하다”는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금지된 것을 탐하는 욕망을 가리킨다. “세상 살림”은 헬라어 ‘비오스’의 번역으로서, 육체적인 조건이나 물질적인 조건에 대한 욕심을 가리킨다.
사도는 이 세 가지가 “하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16절)이라고 말한다. 욕망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선한 선물이다. 문제는 욕망이 죄에 물들어 주어진 한계를 벗어나려 하고, 그릇된 상대를 향한다는 데 있다. “세상에서 온 것”이라는 말은 “타락하여 생겨난 것”이라는 뜻이다. 욕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선한 선물인데, 죄에 물들어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도구가 되었다.
물질 세계는 결국 사라지게 되어 있고, 세상에 대한 욕망도 결국 사라진다. 영원히 남을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17절)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뜻을 행하게 되어 있고, 그것은 영원에 투자하는 것이다.
묵상:
기독교 역사에 금욕주의는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금욕주의란 육신과 물질을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원수로 규정하고, 육신을 괴롭히고 물질에 대한 욕구를 최고도로 억압하는 노력을 의미합니다. 금욕주의의 모든 관심은 육체와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영적 충만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항상 존재해 왔지만, 늘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래서 기독교는 금욕주의를 경계해 왔습니다. 그것은 이원론적인 세계관에 근거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원론이란 세상을 선한 신과 악한 신의 투쟁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과 물질이 악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믿기도 하고, 선한 신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악한 신에게 탈취되었다고 믿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의 창조 교리에 대한 왜곡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거부하고 억압할 대상이 아니라 품고 향유할 대상입니다.
문제는 인간의 죄성에 있습니다. 욕망은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좋은 선물입니다. 욕망이 없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욕망이 죄성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그로 인해 욕망은 만족되지 않는 무저갱이 되어 버렸고, 무한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은 하나님에게 등지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 사회는 수많은 무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싸움판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금욕주의자들은 욕망을 적으로 오인했습니다. 우리가 싸울 적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을 포로로 잡고 있는 죄성입니다.
죄성에 사로잡혀 있는 욕망을 해방시켜 본래의 역할을 하도록 만드는 노력은 “금욕”이 아니라 “절제”입니다. 금욕은 욕망을 적으로 삼는 것이고, 절제는 죄성을 적으로 삼습니다. 금욕은 인간적인 노력이지만, 절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습니다. 그럴 때 욕망은 죄성의 족쇄로부터 풀려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누렸던 “자족의 능력”(빌 4:12)입니다. 사도 요한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을 때, 그가 마음에 두었던 것도 “자족의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고 육신을 사랑하고 물질을 향유하는 삶의 방식을 배우라는 뜻이었습니다.
요절: 15절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속에는 하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기도:
저희의 사랑은 주님께 있습니다. 저희의 만족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향유합니다. 그것들을 향유하지만 결국 놓고 갈 것들임 잊지 않습니다. 저희의 관심사는 오직 세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하오니, 오늘도 저희를 붙드시고 인도해 주십시오. 아니, 저희가 주님을 잊거나 떠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주님은 항상 저희를 붙드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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