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 5장 16-21절: 죄인을 대하는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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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누구든지 어떤 교우가 죄를 짓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가 아니면,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은, 죽을 죄는 짓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죽을 죄가 있습니다. 이 죄를 두고 간구하라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우리는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 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자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은 우상을 멀리하십시오.

해설:

마지막으로 사도는 죄에 대해 다시 한 번 설명을 한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죄”(16절)가 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성령을 거스르는 죄”(마 12:32)라고 했다. 자신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거역하는 것은 용서받을 길을 스스로 막는 셈이 된다. 사도 요한은 이 말을 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건을 부정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용서 받지 못할 죄”라는 표현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는 같은 의미다. 여기서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을 말한다. 그런 죄에 빠진 사람은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죄들은 언제나 돌이킬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중에 죄에 빠진 사람을 본다면, 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에 하나님은 기꺼이 응답하신다. 죽을 죄에 빠진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꽤 냉담하게 들리지만,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발에 뭍은 먼지를 떨어버리라”(마 10:12)고 하셨다. 

“불의한 것은 모두 죄입니다”(17절)라는 말은 죄를 죄로 알라는 뜻이다. 하지만 죄를 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잃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죄를 짓는 상태에 머물러 사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18절)은 그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죄를 싫어하고 의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믿는 이들은 그분의 보호 아래에 있다. “악한 자가 그를 해치지 못한다”는 말은 미혹하여 꼬여낼 수 없다는 뜻이다. “온 세상은 악마의 세력 아래에 놓여 있다”(19절)는 말은 사탄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 세상에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산다.

묵상: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을 강조한 사도 요한은 죄의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관심을 둡니다. 인간 불행의 원인이 죄에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그분의 사랑 안에 거하면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죄를 미워하고 의를 사모하게 하는, 하나님의 씨앗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면 우리를 죄로 이끌던 힘이 약해집니다. 우리를 넘어뜨리던 죄 된 욕망이 힘을 잃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죄성은 잠복 상태에 들어갑니다. 영성이 약해지면 그 죄성은 다시 고개를 들고 우리를 넘어뜨립니다. 하지만 우리를 다시 죄의 노예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 죄 된 욕망을 따라 사탄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그분의 희생으로 자신의 죄가 용서 되었다는 것과 자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주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발로 사탄의 종의 자리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성령을 거스르는 죄”라고 했고, 사도 요한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라고 부릅니다. 

사도 요한은 믿음의 공동체를 흔들고 있던 영지주의적인 이단자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시간이 있으면, 회개가 가능한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고합니다. 때로 사탄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을 봅니다. JMS 정명석 같은 사람이 그렇고, 신천지의 이만희 같은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단 종파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들도 회개의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기준에 따라 구원받을 사람과 받지 못할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큰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지인 중에 이단에 깊이 빠진 사람이 있다면, 구원 여부를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옳습니다. 구원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절: 18절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누구든지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신 분이 그 사람을 지켜주시므로, 악마가 그를 해치지 못합니다.

기도:

저희에게 확신을 주시되 겸손도 함께 주십시오. 그래야 다른 사람의 죄를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기 전에 그의 회개를 위해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는 철저하게 하시되, 사람에게는 자비로 대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누구든지 사랑하는자는 하나님에게서 태어낳고 하나님을 안다“ 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십자가 은혜로 주님의 자녀가 된것을 믿으면서도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지 되돌아 보니 마음이 씁쓸합니다.불의를 미위하고 진리를 기뻐하지만 너무나 수동적인 비겁한 죄인인것을 고백합니다.
    지금부터라도 생각과 말과 마음만으로 사랑하는것이 아니라, 땀과 수고와 희생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것 같이 사랑하기를 원 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푸른 하늘에 뭉게 구름이 보이고 벌써 부터 더운 기운이 물씬한 아침, 월요일입니다. 월요일은 늘 피곤한 건 어쩔 수 없겠지요?

    성경본문(요일5:16-20)을 읽습니다. 짧은 서신서이지만 많은 문장들이 모호하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느낌이라 쉽지 않네요. 악마의 세력아래 있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가족, 곧 공동체. 그 공동체는 자기가 누구인지(=하나님으로 부터 낳은 아이)를 기억하며 서로를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는 약속의 공동체 아닐까요?

    공동체에서 서로 죄를 고백하며 회복을 위해 서로 기도하는 것은 초대공동체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사랑의 중요한 실천행위 아니었을지. 그렇지만 이 기도의 에너지를 적그리스도의 진영으로 넘어간 사람들에게까지 허비하지는 말라는 말씀인 듯. 선택과 집중의 원리? 일단 넘어가기로 합니다.

    이제 또 하루를 시작해야 할 시간. 8월의 둘째주를 맞네요. 업무과제 진도가 생각보다 느리게 나와 마음이 분주한 요즘. 냉온방이 다 되는 미국집에 살며 간밤에는 긴 잠을 자고 아침엔 일어나 커피와 빵을 먹었습니다. 해야할 일과 그 일을 감당할 힘이 아직 있어서, 광야같은 인생을 함께 걸어갈 가족으로 인해 감사. 허락하신 믿음의 공동체도 감사.

    주님과 함께 걸으며 아버지의 자녀답게 사랑의 명령에 순종하는 하루가 되기를. 주께서 자기에게 주신 이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듯, 제 인생의 동산에 허락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되 나 자신을 다 주기까지 사랑하는 인생. 그 촛불같은 사링의 이야기가 나의 노래가 되었으면.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어제 예배의 설교에서 목사님은 교회가 다툼과 분열 속에서 갈라지면 (교단 분리 때를 회상하며) 어느쪽이 망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교회는 이미 그 때 갈라졌고, 드러내놓고 다투거나 떼를 지어 이동하는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사랑과 화목은 뒤로 하고 자기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교회가 싸울 때 ‘망하는’ 쪽, 피해를 입는 편은 다음 세대라고 했습니다. 교회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는 코로나 팬더믹 때 교회를 놓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교회는 뭘 하는 곳인가, 교회는 누구인가…예배의 ‘장소’를 교회에서 가정으로 옮기면서 -깔끔한 옷을 챙겨 입고 시간에 늦지 않게 조심하며 가던 예배가 실시간을 놓치면 나중에 녹음으로, 입고 있던 대로, 소파에 앉아 ‘보면’ 되는 예배로 바뀌면서- 하나님의 얼굴 또한 바뀌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던 무서운 하나님이 한 세대를 지나며 야곱이 차린 음식에 기분이 좋아져 음성도 다르고 촉감도 다른 둘째를 맏이로 착각하고 마음껏 축복하는 늙은 아버지처럼 나의 하나님은 얼굴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집으로 직접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셔도 낫겠다는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은 코로나 시대의 예고편이었습니다. 예배, 일, 공부, 회의, 행사, 만남… ‘말씀으로’ 다 되었습니다. 팬더믹이라고 교회를 떠난게 아니라 팬더믹이 끝났어도 교회로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다고 해야 할지 모릅니다. 어렵고 힘들게 교회로 모인 뒤에 여러 감리교회들이 교단분리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나갈 사람은 어째도 나갈거였고 남은 사람은 어째도 남았을거라는 너무 뻔한 말,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하면서 교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녀, 나가도 부모와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 자녀들은 사정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한인교회는 ‘동성애 이슈 때문에 갈라졌다’는 헤드라인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동성애 이슈 앞에서 우리는 판사, 검사, 변호사, 배심원 역할을 다 했습니다. 누구도 피고의 자리에는 앉지 않고 판단과 정죄의 과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오늘 본문과 목사님의 해설을 읽으니 어제 설교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 본문은 디모데 후서였습니다. 바울입니다. 요한과 동시대입니다. 바울도 요한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히브리 백성의 후예지만 예수님을 만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거듭난 인생입니다.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라 마음 약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속아주고, 기다리고, 죽여도 괜찮다며 방어하지 않는 아버지를 만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아버지의 자녀인데 자녀들이 모인 교회는 그런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는지요.

  4. gachi049 Avatar
    gachi049

    인간은 원죄로 인해 죄를 지을 가능성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성령님 안에 거할 때, 구원받아 죄에서 자유롭게 됨을 믿습니다. 주님, 죄인이라 하여 멸시하고 외면하지 않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도록 성령님께서 함께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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