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1장 1-6절: 진리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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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장로인 나는 택하심을 받은 믿음의 자매와 그 자녀들에게 이 글을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진정으로 사랑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속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그 진리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대의 자녀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계명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자매여, 지금 내가 그대에게 간청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새 계명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을 써 보내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해설:

저자는 자신을 “장로”(1절)라고 부른다. “택하심을 받은 믿음의 자매”는 어떤 여성 신도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교회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다. 교회를 가리키는 헬라어 ‘에클레시아’가 여성 명사이므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믿음의 자매와 그 자녀들”이라는 표현으로 저자는 전체로서의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각 신도들을 모두 대상으로 삼는다. 

장로 요한은 그들에 대한 사랑 고백으로 시작한다. “진리를 깨달은 모든 사람”은 믿는 이들을 가리킨다. 여기서의 “진리”는 “복음의 진리” 혹은 “구원의 진리”를 의미한다. 그 사랑은 진리에서 나온다. 그 진리는 “지금 우리 속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2절)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공유한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으로 사귀게 되어 있다. 

장로는 편지 형식을 빌어 수신자들에게 축복의 인사를 보낸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로마식의 인사말 “은혜”와 유대인들의 인사말 “평화”를 묶어서 인사하는데, 저자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으로”(3절) 함께하기를 빈다. 바울 사도처럼 “여러분에게 있기를 빕니다”라고 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장로는 축복의 말에 자신을 포함시킨다. 바울 사도는 사도적 권위로써 축복의 말을 전한 것이고, 장로 요한은 형제애로써 자신을 낮춘다.   

본론을 시작하면서 장로 요한은 수신자들의 믿음을 칭찬한다(4절). 하나님의 진리는 그분이 주신 계명 안에 담겨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계명”은 율법 조문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신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다. 그 계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계명”(5절)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주신 계명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실상 사랑의 계명은 태초부터 있었다. 계명은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6절). 

묵상:

장로 요한은 진리와 사랑을 짝으로 제시합니다. 일반적으로 “진리”는 보통명사이고 추상명사이지만, 장로 요한에게 그것은 고유명사요 구상명사입니다. 고유명사라고 하는 이유는, 장로 요한이 생각한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육화된 “그 진리”(the Truth)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 말씀”(the Word)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말씀/진리는 태초부터 있었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이셨다고 했습니다(요 1:1).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고, “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진리 그 자체이셨고, 부활 승천하셨을 때 그분은 “진리의 영”을 보내 주셨습니다.  

“사랑”도 일반적으로 보통명사요 추상명사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은 고유명사요 구상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히브리어로는 ‘헤세드’로, 헬라어로는 ‘아가페’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는 완전한 사랑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었고, 십자가 위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말씀/그 진리”이신 하나님은 또한 “그 사랑”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진리이시기에 또한 완전한 사랑이십니다. 참된 사랑은 진리 안에 있고, 진리는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또한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 요한은 그 진리가 “지금 우리 속에 있고, 또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랑”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진리는 동의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켜야 할 유일한 계명입니다. 

요절: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

진리를 빌미로 사랑을 제한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랑을 핑계로 진리에 눈 감지 않게 해주십시오. 진리에 대한 저희의 추구가 사랑의 행위로 표현되게 해주십시오. 사랑에 대한 저희의 갈구가 진리로 인해 채워지게 해주십시오. 진리와 사랑의 영으로 저희를 충만하게 채워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gachi049 Avatar

    사랑과 진리는 분리할 수 없는 운명공동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어떠한 고난과 유혹이 오더라도 진리를 거스르지 않게 하시고, 사랑이 없는 삶이 되지 않게 하시며,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따르는 삶이 되도록 성령님께서 늘 동행하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Bill Kim Avatar
    Bill Kim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는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절을 읊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진리인 동시에 사랑이신 하나님 이신것을 믿게하시는 진리와 사랑의 영에게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주신 계명을 지켜야 하는것을 알면서도 진정으로 사랑 하지못하고 자신의 유익을 챙길려는 욕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실정입니다.그러나 십자가의 문이 열려있어 십자가밑이 무릎을 꿇을수 있는 기회를 항상 허락하신 은혜에 또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매일 매일 일상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함으로 사는 삶을 살아내는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되기를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아멘.

  3.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생각이 많았는지 좀 일찍 잠이 깨었습니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많이 낀 화요일 아침. 사무실에 출근하는 날입니다.

    오늘의 본문(요이1:1-6)을 읽습니다. 요한 일서와 달리 ‘보낸 이’(장로 요한)와 ‘받는 이’ (택하심을 받는
    어떤 자매)를 특정하고 있지만 이것이 정말 개인서신인지, 그런 문학형식을 빌린 순회 설교 서신인지에는 이견이 있다고 하네요 (Copilot).

    사랑과 진리의 관계에 촛점을 둔 목사님의 풀이말씀이 공감을 줍니다. 제게는 6절 말씀이 특별한 울림이 있네요. And this is love…. 사랑은 순종 안에서 걷는 것 (to walk in obedience).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 안에서 걷는 것 (to walk in love). 때로 넘어지고 때로 방황하지만 길 되신 주님 안에 끝내 머물면 제게 주신 이 길, 순종의 길 그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낼 수 있을까요? 제가?

    메트로 창밖으로 뿌연 하늘이 왠지 모를 서글픔을 줍니다. 오늘도 깨어나, 따뜻히 씻고, 커피와 빵을 먹고 두 발로 너끈히 걸어 출근합니다. 아직도 일하러할 수 있어 감사. 가족으로 인해 감사.

    오늘도 사랑 안에서 걷는 하루가 될 수 있을까요? 조건이 없는 사랑,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성내지 않지만 불의를 기뻐하지도 않는 사랑. 그 사랑의 계명에 순종하며 경건의 능력을 배워가는 나날. 그것이 저의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제자들은 어디서 활동했을까 궁금해 찾아봤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가르쳤지만 오순절 이후에 제자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져 복음을 전했습니다. 10년 정도 예루살렘에 남아 핍박을 견디며 신자 공동체를 지켰지만 사도행전이 전하듯 도시 밖으로, 유다 땅 너머로 나가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베드로는 안티옥과 로마로 갔습니다. 안드레는 흑해 주변국 현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그리스에서 활동하다 순교했습니다. 도마는 중동과 인도까지 갔습니다. 인도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마태는 페르시아와 에디오피아에서 말씀을 전하다 순교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바돌로매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인도까지 간 것으로 전해집니다. 빌립은 동유럽과 우크라니아 지역과 소아시아 지역을 다녔습니다. 세베대의 아들, 요한의 동생 야고보는 스페인까지 갔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헤롯 아그립바 왕에게 목을 베이고 순교합니다. 또다른 야고보는 예루살렘의 초대 감독이 되었으며 산헤드린의 협박과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도 순교합니다. 요한은 에베소와 소아시아 지방 교회들을 돌보고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살다가 그리스의 파트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자연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아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이 정도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더 있을 수 있고, 초대 기독교 시대에 이름을 모르는 이들이 선교하고 순교한 기록도 어딘가에 묻혀 있을 지 모릅니다. 무엇이 이들을 멀리까지 가게 했을까요. 직접 가지 못하면 편지로라도 예수님의 삶을 그분의 ‘의미’를 나누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요. 진리와 사랑에 대한 책임감과 소명감이었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혼자만 알고 있을 수 없고, 형제애의 뜨거움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결국 혼자라며 각자 알아서 살아 남으라고 하는 지금, 예수님과 함께 걸었던 이들의 수고와 희생의 열매로 내가 사는구나…싶습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혼자 살아서도 안되고, 혼자 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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