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기 6장 15-27절: 거룩함을 이루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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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드디어 이렛날이 되었다. 그들은 새벽 동이 트자 일찍 일어나서 전과 같이 성을 돌았는데, 이 날만은 일곱 번을 돌았다. 일곱 번째가 되어서,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렇게 명령하였다. “큰소리로 외쳐라! 주님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다.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라. 그러나 창녀 라합과 그 여인의 집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살려 주어라. 그 여인은 우리가 보낸 정탐꾼들을 숨겨 주었다. 너희는, 전멸시켜서 바치는 희생제물에 손을 댔다가 스스로 파멸당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여라. 너희가 전멸시켜서 바치는 그 제물을 가지면, 이스라엘 진은 너희 때문에 전멸할 것이다. 모든 은이나 금,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은, 다 주님께 바칠 것이므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의 금고에 넣도록 하여라.”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 소리를 듣고서, 백성이 일제히 큰소리로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렸다. 백성이 일제히 성으로 진격하여 그 성을 점령하였다.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 여호수아는 그 땅을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그 창녀의 집으로 들어가서, 너희가 맹세한 대로, 그 여인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그 곳에서 데리고 나오너라.” 정탐하러 갔던 젊은이들이 가서, 라합과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버니들과 그에게 딸린 모든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라합의 식구들을 모두 이끌어 내어, 이스라엘 진 밖으로 데려다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 성읍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태웠다. 그러나 은이나 금이나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만은 주님의 집 금고에 들여 놓았다. 여호수아는 창녀 라합과 그의 아버지 집과 그에게 딸린 사람을 다 살려 주었다. 라합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는데, 그것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도록 보낸 사람들을 그가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여호수아가 이렇게 맹세하였다. “이 여리고 성을 일으켜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자는, 주님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다. 성벽 기초를 놓는 자는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성문을 다는 자는 막내 아들을 잃을 것이다.” 주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의 명성이 온 땅에 두루 퍼졌다.

해설:

일곱째 날이 되자,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전날처럼 여리고 성을 여섯 바퀴 돈 후에 일곱 번째 돌 때에는 일제히 소리를 지르라고 이른다(15-16절). 그렇게 하면 여리고 성이 무너질 것이며, 그 때 성 안으로 들어가 라합과 그의 가족만 살려 두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라고 명한다(17절). “전멸시키라”(18절)는 말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죽여 없애라는 뜻이다. 살아있는 생명 외에 모든 물건은 불태워 없애고, 은이나 금,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만 모아 놓으라고 이른다(19절). 

이스라엘 백성은 새벽 일찍 일어나 여리고 성 주위를 돌기 시작했고, 일곱 바퀴 째가 되자,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제사장들은 나팔을 길게 불었고, 백성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견고했던 여리고 성이 거짓말처럼 무너져 내렸다(20절). 이스라엘 백성은 성 안으로 들어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를 죽였고, 그들이 기르던 집짐승까지 죽였다(21절). 

여호수아는 정탐하러 갔던 두 사람을 시켜 라합과 그 가족을 데려오게 했고(22절), 그들을 진 바깥에 머물게 한 다음, 성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앴다. 은이나 금, 놋이나 철로 만든 그릇들은 모아서 “주님의 집 금고”(23절)에 넣어 놓았다. “주님의 집”은 성막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라합과 그 가족은 정탐꾼에게 행한 호의로 인해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24-25절). 

전쟁이 끝나자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다시 세우는 자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한다(26절). 이 일로 인해 여호수아의 명성은 더욱 높아진다(27절).

묵상:

어릴 때 ‘성경 동화’ 시간에 여리고 성 함락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기까지의 일들이 참으로 드라마틱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은 정말 위대하시다”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철이 들고 나서 이 이야기를 읽을 때는 17절과 18절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멸시키라”는 명령은 히브리어로 ‘헤렘’인데, 이것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여성, 어린이, 노인, 가축까지 포함)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살륙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악행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죽기 전에 가나안 점령에 대해 말하면서 ‘헤렘’을 명령합니다(신 7:2).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따라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모든 생명체를 멸절시키라고 명합니다. 이 장면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명령을 주실 수 있지?” 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명시적으로 ‘헤렘’을 명령하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가나안 민족을 심판하기로 하셨고,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가나안 민족들을 몰아내고 그 땅에 정착하라고 하셨지만,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 없애라고 명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진멸하라”는 명령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명령입니다. 하나님에게서 그런 명령을 받아서 그렇게 말했는지는 모르지만, 본문 상으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없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한시적으로 ‘헤렘’ 전쟁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을지 모릅니다. “가나안 백성을 몰아내라”는 명령을 그런 뜻으로 해석했을지 모릅니다. 당시 가나안 토착민들의 문화와 관습을 깨끗이 치워내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에 물들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자라가는 데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신속하게 우상 숭배에 빠지고 부도덕한 생활 방식에 물들었습니다. ‘헤렘’ 전쟁이 그들의 거룩성을 보장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전쟁으로 애꿎은 희생자만 만들어 낸 셈입니다. 

후대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이 당시의 전쟁 서사 기법을 사용하여 철저한 진멸을 강조했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은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주변 문화에 동화되지 말고 철저하게 자신을 지키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이렇게 썼을지 모릅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불리한 환경을 제거하는 것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부름은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 도피하라는 뜻도 아니고, 우리의 기준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하고 배척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우리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 땅에서 제거하라는 뜻은 더 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알아 차별성 있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헤렘’ 전쟁은 그 진실을 잊지 말라는 뼈저린 실패의 기억일 수 있습니다. 

요절: 21절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

기도:

저희의 싸울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떤 사람이든 저희에게 보내주신 사람들은 사랑과 섬김의 대상입니다. 진실하게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가장 높은 거룩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저희가 추구할 거룩은 오직 사랑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멘. 

3 responses

  1. Bill Kim Avatar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희미하게 보나 그때가되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것 같이 온전히 알리라“ 는 말씀을 기억합니다.여리고성안에 움직이는 모든생명을 진멸시키라는 명령이 걸림돌이 됩니다만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우상과 가치관을 진멸하라고 명하셨다고 믿고 따르는것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명령인것 이라고 고백합니다.
    십자가 깃발을 높이 들고 무너진 여리고성으로 들어갑니다, 누구던지 십자가 깃발을 보고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고 외치면서, 승전가를 부르며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 함께—— 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하늘은 드높이 푸르고 바람이 제법 쌀쌀한 아침, 월요일입니다.

    본문(여6:16-27)을 읽습니다. 백성이 여리고성을 돌며 나팔을 분 제칠일. 모두가 그 성을 향해 일제히 소리를 지르고 성은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잔혹한 헤렘 (=진멸). 귀금속을 제외한 모든 사물의 파괴. 기생 라합 일가를 구원함. 글쎄요. 목사님의 묵상처럼 참 난감하고 생각이 많아지는 본문. 이 잔인한 학살의 서사가 문자 그대로의 팩트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 일단 위안를 줍니다.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 그리고 진노의 날, 심판이 날이 꼭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본문? 목사님의 묵상처럼 악은 우리 존재 밖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안에 있고, 정화는 단번에 행하는 정복전쟁이 아니라 매일 갱신하는 마음의 피흘림, 마음의 할례임을 기억해 봅니다.

    이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분주한 한 주. 삶은 때로 여리고 성벽처럼 강고하고, 밤길의 들짐승처럼 두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용기를 내어 한 주를 시작해야 하겠지요? 간 밤에 잠을 주시고 아침에는 일어나 숨쉬고 먹고 말도 하게 하시는 이께 경배. 가족을 주신 은혜를 감사.

    하나님의 엄위와 자비를 늘 기억하였으면. 심판과 재림의 날은 꼭 오고 그날에 보응이 있음을. 정결케 하는 샘으로 매일 나아가 내 죄. 이 주홍같이 죄를 흰눈보다 더 희게 씻기는 정화의 나날. 그것이 나의 삶 나의 순례의 이야기가 되기를.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생각’ 버튼을 끄고 읽으면 술술 읽히고 재미도 있고 통쾌함도 느낄 수 있는 본문이지만, 전쟁과 재해로 고통 받는 이들의 잔상을 머리에서 지우지 못한채 읽으면 정말? 하나님이? 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의 권위를 세워주려는 스토리 전개가 아닐까, 의심도 듭니다. 이스라엘은 손 안 대고 코 풀듯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립니다. 성 안에 살던 주민들은 도망갈 틈도 없이, 어디로 피신해 볼 궁리를 내지 못한 채 죽습니다. 제사장들이 부는 나팔 소리가 성벽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여리고 사람들에게 보이신건지, 이스라엘에게 증명하신건지, 혹은 가나안 땅의 여러 민족들에게 알리신건지…마지막 절은 이 일로 여호수아가 온 땅 위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그의 명성이 온 땅에 두루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라합의 식구들이 구원을 받는 장면도 들어 있습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었다고 했는데 (2:15) 나팔 소리에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정탐꾼이 가서 구해낸 것인지, 무너진 뒤에 살아남은 식구들을 구조해 나온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라합과 온 가족을 이스라엘의 진 밖으로 데려다 놓았다는 23절에 대해서 신학적 물음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원래 진 밖은 부정할 때 임시적으로 가서 지내는 곳입니다. 진의 안과 밖은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서도 어느 한 쪽에 동화되지 않은 채 걸쳐서 살던 사람이라는 뜻일까요. 경계선, 경계에서 사는 사람? 성벽 위에 집이 있었다는 것도 그렇고, 무너지는 성에서 구조되어 진 밖으로 안내를 받았다는 것도 그런 뜻일까요. ‘in between’ 의 시공에 거주하는 사람? 본문에는 모두 없애버리라는 헤렘의 명령이 네 번쯤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명하신게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렇게 듣고 해석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는 점에서 불편함은 남습니다. 주일 예배 때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목사님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을 선포할 뿐’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회중은 그렇게 이해하고 듣습니다. ‘정말, 너무 아닌 것 같은’ 말씀을 해도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입니다.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와 회중 사이에 이해와 약속 같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 (메신저)가 아니라 말씀이, 메시지가 중심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메시지가 어떻게 들렸는지, 누구에게 가서 꽂혔는지, 들은 사람이 그 메시지를 갖고 어떻게 할 지 모르는 일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다는 것을 온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명성은 온 땅에 두루 퍼졌습니다. 전쟁으로 유명해지는 것은 본인에게나 그 시대에나 다 불행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헤렘의 명령은 이제 사랑의 명령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십니다. ‘새 계명’을 주십니다. 정복에서 희생으로 명령이 바뀝니다. 세상은 여전히 악한데 그 안에 사는 우리는 새 명령을 받습니다. 헤렘도 어렵고, 사랑도 어렵습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셔야 지나갈 수 있겠습니다. 주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이 시대를 구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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