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장 13-17절: 주님이 원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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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우쭐대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해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상인을 예로 들어 가르침을 준다. 우리 번역에서는 “들으십시오”(13절)가 문장 마지막에 나오지만, 원문에서는 처음에 나온다. 5장 1절에서도 사용된 표현으로서, 이어지는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사도는 가상의 화자를 설정하여 대화를 주고 받는 화법(‘디아트리베’)을 자주 사용한다. 

가상의 화자는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문제는 “장사하여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는 믿음이다. 우리 말 번역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네 개의 동사(“우리가 가다”, “우리가 머물다”, “우리가 장사하다”, “우리가 돈을 벌다”)를 연달아 사용된 것을 보면, 화자는 인생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믿고 있다. 일인칭 단수 대명사(“내가”) 대신에 복수 대명사(“우리가”)를 사용한 이유는 독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읽게 하려는 문학적 전략이다.   

야고보 사도는 두 가지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가상의 화자의 잘못된 생각을 들추어낸다(14절). 인간은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 지조차 알지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이 첫째요, 인생이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이 둘째다. 이 사실을 안다면, 미래에 대해 함부로 장담하지 않게 된다(15절).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만 이런 일도, 저런 일도 할 수 있다. 가상의 화자는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울쭐대면서 자랑하고”(16절) 있다. 사도는 “그 자랑은 악한 것입니다” 라고 단정한다. 그것은 악에서 나오는 생각이며, 악으로 이끄는 생각이다.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된다”(17절)는 말씀은 독립된 격언처럼 보이는데, 앞의 내용과 연관지어 보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면 인정하고 실천하라는 뜻이 된다. 즉 인생이 자신의 통제 하에 있는 것처럼 우쭐대면서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묵상: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눅 12:13-21)를 생각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형제들과 벌이고 있는 유산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청하자, 예수님은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14절)고 말씀하시면서 어떤 부자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그는 이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큰 수확을 거두자 곳간을 헐고서 더 크게 짓고, 곡식과 물건들을 다 거기에다가 쌓아 두기로 계획하면서, ”영혼아,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마음놓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19절) 하고 자축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하나님은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장만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20절) 하고 물으십니다. 그 부자는 세상적으로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매우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생각에는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일도 오늘처럼 든든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주를 주인공으로 삼았는데, 야고보는 상인을 주인공으로 삼았습니다. 갈릴리 주민들은 주로 지주와 소작농이었으나, 야고보의 독자들은 로마 제국의 여러 도시에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독자들을 위해 예수님의 비유를 살짝 바꾸어 가르침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이 말 속에는 아주 깊은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고백이요, 자신의 존재와 활동은 그분의 다스림 아래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에게 가장 복된 일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주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무엇을 이루었다고 우쭐해져서 자랑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힘 쓸 일은 주님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사는 한, 교만해져서 고개 쳐 들 일도 없고, 열패감에 고개 숙일 일도 없습니다.

요절: 15절

도리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기도:

오늘도, 주님께서 원하셔서, 새 아침을 맞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셔서 하루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는 것도 주님의 은혜요, 죽는 것도 주님의 뜻입니다. 주님 안에 살다 주님 안에서 죽습니다. 그것이 저희의 행복입니다. 아멘.  

3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87년을 지나고 보니 진실로 한 사람의 인생이 짧고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럼에도 내몸을 주님께로 부터 받은바 내것이 아닌것을 알면서도 내 자신이 주인으로 “대박“만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오늘 부터라도 주님만 의지하고 살기를 원 합니다, 도와 주십시오.“Faith in action” 주님의 향기가 이웃에 퍼지는 삶을, 본향에 도달할때 까지——- 아멘. 아멘. 아멘.

  2.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오늘 말씀은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 것처럼 착각하여 계획 -가고 머물고 장사하고 돈을 버는 계획-을 세우고 당당해 하는 지주와 상인을 예로 들어 경고합니다. 인생이 잘 나갈 때 더 큰 곳간을 짓고 재물관리를 하겠다는 부자에 대해 경고하신 예수님의 비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사유 방식은 인간을 자기 삶의 독립적인 주체로 보는 근대 17, 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 자리 잡았습니다. 인간을 공동체 (혈연, 지연, 국가 등)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나 거대한 우주의 질서나 신의 섭리 속의 작은 일부로 보던 고대와 중세의 인간관은 르네상스 (14-16세기)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이 가진 가치와 잠재력을 인정하는 사조로 발전했습니다. 근대와 현대 사회에서 인간은 이성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독립된 개체의 위치로 격상되었고, ‘나’는 세계를 인식하고 이끄는 주인공이라는 합리주의와 자유주의의 토양 속에서 자아의 성장과 성숙, 실현 등 일체의 노력이 존중 받고 인정 받는 데까지 왔습니다. 우리 시대의 키워드도 개인의 자유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비유, 야고보 사도의 경고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가에 묵상의 초점을 놓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말씀 (성서)의 권위는 개인 결정권보다 아래에 있습니다. 사회 공동체의 이익이나 국가의 통제를 생각하기 전에 내게 유익한 지 아닌지 부터 따지는 것이 현대인의 속성입니다. 성과와 과실도 자기 것이고 실수와 책임도 자기 것이 됩니다. 스트레스는 자연스러운 부산물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단순합니다. 내일도 오늘처럼 평안하고 좋을 것이라는 ‘착각’으로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고 이웃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평범한 부자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는 비유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라는 교훈을 확인 시킵니다. 야고보는 ‘주께서 원하시면’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 원하는대로 할거야,’ ‘자기가 좋으면 좋은거지,’ ‘내가 하겠다는데 누가 말려?’ 이런 마음을 부추기고 확대 시키는 유혹이 여러 가지입니다. 매일 우리를 찾아옵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상업사회에서, 경제 위주의 가치관 속에서, 미디어를 통해 우리를 유혹하는 이런 생각들을 떨쳐 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이 우리 시대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싸움입니다. 콜로세움에 서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싸움 아니고, 사자들에게 포위되어 뜯겨 먹히는 죽음 아니고, 예수님의 그림에 침을 뱉고 밟고 지나가야 하는 괴로움 아닙니다. 우리의 싸움은 주께서 원하시느냐, 내가 원하느냐 이 질문을 피하려는 마음과의 싸움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지 묻지 않고 넘어갑니다. 주께서 원하신다고 속단하고 넘어갑니다. 내가 원하면 되는 거라고 고집 부리면서 넘어갑니다. 이렇게 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요. 남편과 걷다가 내 속의 격정 -분노의 상대가 있기도 하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분노이기도 한- ..을 내보였더니 남편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사람이) 크게 정신소모를 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과거에 대한 후회와 앞날에 대한 걱정이야.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가 없는거고, 미래는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건데 우리는 이 둘을 놓고 너무 많은 에너지를 써. 이젠 이걸 안해야 해. 이걸 줄여야 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데 그걸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원하시면’이라는 생각을 잠깐만 해봐도 답이 나오는데 그걸 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의 지적은 가고 머물고 장사하고 돈을 버는 계획이 틀렸다는게 아닐겁니다. 지금 곳간이 작으니 크게 새로 짓겠다는 계획이 어리석다는게 아닐겁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하는 눈 먼 상태, 이웃의 신음을 듣지 못하는 귀 닫힌 상태, 나의 욕심과 교만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의 상태를 경고하는 말씀일겁니다. 내가 가는 길을 먼저 가시며 또한 내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주님을 보기를 원합니다. 때론 가족으로, 친구로, 타인으로 내 곁에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3. gachi049 Avatar
    gachi049

    “이제 내가 살아도 주 위해 살고 이제 내가 죽어도 주 위해 죽네”라는 복음성가 가사처럼, 나의 모든 삶을 주께 맡깁니다. 남은 여생을 주님의 다스림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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