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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사슬로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그 의인은 그들 가운데서 살면서, 보고 듣는 그들의 불의한 행실 때문에 날마다 그의 의로운 영혼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두실 줄을 아십니다. 특히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과,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대담하고 거만해서, 겁도 없이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욕합니다.
해설: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후(3절), 사도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세 개의 유명한 심판 이야기를 예로 든다. 첫째는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저지른 이야기다(4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해석한다. 창세기에는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없다. 그들을 지옥에 던져서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했다는 해석은 외경 에녹 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둘째는 창세기 7장 이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다(5절). 홍수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덮어 심판한 사건이며,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정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의 번역으로서, “의” 혹은 “올바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게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가 스스로 의롭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 심판 이야기다(6-8절).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이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6절)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7절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사건 즉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방문한 손님들을 내놓으라고 롯을 괴롭힌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다. 베드로 사도는, 의로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주민들의 불의한 행실로 인해 “날마다 고통을 느끼고”(8절) 있었다고 말한다.
9절 이하는 앞에서 언급한 세 사례에 대한 결론이다. 세 사례들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날까지 가두어 두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도는 “성적인 부도덕”과 “권위를 멸시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권위를 부정하는 것”의 자세한 의미는 10절에서 드러난다. 불의한 사람들은 최종 권위인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모른다.
묵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좋은 면만 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사랑만 하시는 분이어야 하고, 복만을 베풀어 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워하는 것과 징계하는 것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하고 악행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고대 사람들의 원시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일 뿐,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바램(wishful thinking)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이야기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인간의 악행을 참고 보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지만, 때로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땅에서 받는 징계는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심판으로 징계 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악행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내버려둘 수 없을 정도로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렇게 악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토로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현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로 인해 의롭게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애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럴 때면 아삽처럼,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13)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서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행을 마지막 심판대에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회개의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악행을 최대한 견디고 참고 기다리십니다. 다만, 그 악행이 너무나 심하고, 그로 인해 롯 같이 의로운 사람들이 지나친 해를 입을 때면, “예외적으로” 현실 세상에서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받은 심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번성으로 인해 고민하던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시 73:17) 해결받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 아삽으로 하여금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요절: 9절
주님은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두실 줄을 아십니다.
기도:
저희의 마음도 아삽처럼 자주 흔들립니다. 사람들의 악행은 가깝고, 하나님의 정의는 멀어보입니다. 그로 인해 저희의 발이 미끄러지려 할 때, 오 주님, 전능의 손으로 저희를 잡아주십시오. 살아계시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주님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해주십시오. 롯처럼 사람들의 악행으로 인해 아파하면서 의롭게 살도록 힘쓰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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