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2장 4-10절: 현실 심판과 마지막 심판

3–4 minutes

To read

음성듣기

본문: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지옥에 던져서, 사슬로 묶어,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는 또 옛 세계를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홍수로 덮으셨습니다. 그 때에 그는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인 노아와 그 가족 일곱 사람만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 두 성을 잿더미로 만들어 [멸망시키셔서,]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무법한 자들의 방탕한 행동 때문에 괴로움을 겪던 의로운 사람 롯은 구하여 내셨습니다. 그 의인은 그들 가운데서 살면서, 보고 듣는 그들의 불의한 행실 때문에 날마다 그의 의로운 영혼에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두실 줄을 아십니다. 특히 더러운 정욕에 빠져서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과, 권위를 멸시하는 자들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대담하고 거만해서, 겁도 없이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모욕합니다.

해설:

거짓 예언자들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 후(3절), 사도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세 개의 유명한 심판 이야기를 예로 든다. 첫째는 창세기 6장 1-4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음행을 저지른 이야기다(4절). 베드로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해석한다. 창세기에는 그들의 죄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가 없다. 그들을 지옥에 던져서 심판 때까지 어두움 속에 있게 했다는 해석은 외경 에녹 1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둘째는 창세기 7장 이후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다(5절). 홍수는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세계”를 덮어 심판한 사건이며,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 노아와 그 가족을 구원하신 사건이다. “정의”는 헬라어 ‘디카이오쉬네’의 번역으로서, “의” 혹은 “올바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게 살았던 한 사람이었다. 베드로 사도는 노아가 스스로 의롭게 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의 말에 귀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셋째는 소돔과 고모라 심판 이야기다(6-8절). 베드로는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심판이 “후세에 경건하지 않은 자들에게 본보기”(6절)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7절은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사건 즉 소돔 사람들이 롯의 집에 방문한 손님들을 내놓으라고 롯을 괴롭힌 이야기에 대한 언급이다. 베드로 사도는, 의로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살면서 주민들의 불의한 행실로 인해 “날마다 고통을 느끼고”(8절) 있었다고 말한다.

9절 이하는 앞에서 언급한 세 사례에 대한 결론이다. 세 사례들은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 주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날까지 가두어 두신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사도는 “성적인 부도덕”과 “권위를 멸시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한다. “권위를 부정하는 것”의 자세한 의미는 10절에서 드러난다. 불의한 사람들은 최종 권위인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모른다.

묵상: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면서 좋은 면만 보려고 합니다. 그분은 사랑만 하시는 분이어야 하고, 복만을 베풀어 주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워하는 것과 징계하는 것과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타락하고 악행을 저질러도 하나님은 무한히 용서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판과 지옥에 대한 성경의 언급은 고대 사람들의 원시적인 사고에서 나온 것일 뿐, 하나님의 성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바램(wishful thinking)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경의 이야기들이 후대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났던 이야기들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 이야기들은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분은 인간의 악행을 참고 보시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리시지만, 때로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땅에서 받는 징계는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모두 “최후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심판으로 징계 당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악행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내버려둘 수 없을 정도로 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저렇게 악하게 사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가?”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토로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현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고통 당하고 악한 사람들이 득세하는 현실 때문입니다. 그런 현실로 인해 의롭게 살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애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럴 때면 아삽처럼,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13)라고 탄식하게 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의 실마리가 오늘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서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악행을 마지막 심판대에서 처리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회개의 가능성” 때문에 인간의 악행을 최대한 견디고 참고 기다리십니다. 다만, 그 악행이 너무나 심하고, 그로 인해 롯 같이 의로운 사람들이 지나친 해를 입을 때면, “예외적으로” 현실 세상에서 심판으로 징계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조차 최종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받은 심판과는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악인들의 번성으로 인해 고민하던 아삽은 “성소에 들어가서야 비로소”(시 73:17) 해결받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이 아삽으로 하여금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않게 해 주었습니다. 

요절: 9절

주님은 경건한 사람을 시련에서 건져내시고, 불의한 사람을 벌하셔서, 심판 날까지 가두어두실 줄을 아십니다.

기도:

저희의 마음도 아삽처럼 자주 흔들립니다. 사람들의 악행은 가깝고, 하나님의 정의는 멀어보입니다. 그로 인해 저희의 발이 미끄러지려 할 때, 오 주님, 전능의 손으로 저희를 잡아주십시오. 살아계시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주님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해주십시오. 롯처럼 사람들의 악행으로 인해 아파하면서 의롭게 살도록 힘쓰게 해주십시오. 아멘. 

4 responses

  1.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면서 창밖의 풍광이 어슴푸레 드러나는 시간, 토요일 새벽입니다.

    오늘의 본문 (벧후2:4-10)을 공부해 봅니다. 초대 교회에 번지던 이단주의 (영지주의, 도케티즘).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질서 (=영광있는 자들, 10절, 천사 권세와 주권)를 “아르콘” 곧 영혼을 가주는 존재로 비하하고 규범과 윤리를 부정했다고 하지요 (Copilot).

    예수의 이름 아래 숨어 전혀 다른 믿음을 퍼뜨리며 우리의 구원을 끊어지게 하려는 악한 자의 궤계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지 않을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내 뜻대로 해석하고 내 필요대로 취사선택하고 싶은 유혹. 그것은 내 마음 안에서 부터 생겨나는 더 무서운 마귀의 올무는 아닌지? 나는 안전한지? 내 공동체는 안전한지?

    이제 하루를 시작하려해요. 어제는 일찍부터 짧지만 깊게 잠을 잤습니다. 성경을 묵상하다보니 점점 배가 고파와요. 이제 곧 따뜻한 빵과 커피를 먹겠지요? 오랜만에 가족이 함께 모이는 날. 손주와 함께 동네 수영장에도 갈 계획입니다.

    삶을 주셔서 감사, 가족으로 인해, 그리고 쉼과 사귐을 허락하심도.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창조의 주,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오늘이 되기를. 정직하게 주의 말씀을 대하고 그 뜻을 매일 더 알아가며, 주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주의 사랑으로 내 이웃을 영접하는 나날, 그런 인생 주시기를.

  2. Bill Kim Avatar
    Bill Kim

    요즈음 세상 모든 사람들과 사회와 나라들이 AI 에 몰입하고 있는데 저희들이 바벨탑를 쌓고 있는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성적 문란이 점점 더 해지고 부정과 부조리가 만연하는 세상을 보며 소돔과 고모라의 때를 연상합니다.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인 동시에 위엄과 공평의 심판자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서 사귐의 소리 가족 모두가 십자가로 인한 의인이 되는길을 세상에 알려 구원 받는 니누웨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시간이 참 빠르지요. 어느새 토요일입니다. 요즘엔 해가 질 무렵에 산책을 나갑니다. 큰 길 건너편 주택가를 길 따라 구석구석 걸으면 70분쯤 걸립니다. 길 따라 눈에 익숙한 집과 뜰, 나무들이 늘어납니다. 그림 솜씨가 없는게 한스럽습니다. 집마다 모양새가 다르고, 특히 나무들은 이름을 몰라 미안하지만 생김새가 출중한 ‘잘 생긴’ 나무들이 있어서 공책이라도 들고 다니며 스케치로 남기면 좋겠다 싶습니다. 아니면 ‘동네 지도’라도 만들어 인상적인 집과 뜰을 기억 속에 붙잡아 두고 싶습니다. 감리교단에서는 약화된 재정을 재정비하고 관리하기 위해 ‘내러티브 예산 Budget with Narratives, Narrative Budget’을 도입합니다. 현상황을 파악하고, 핵심 사역과 프로그램의 우선순위를 정해 청지기적인 마인셋으로 수입과 지출을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러티브 예산의 예를 찾아보면 재정이 필요한 사역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스토리로 풀어 나간 서류도 있습니다. 내가 만들고 싶은 동네 지도도 내러티브 맵 같은겁니다. 다만,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을 전혀 모르니 스토리/내러티브가 없다는게 문제지요. 지옥을 그린 서양의 그림으론 히어로니무스 보쉬의 ‘세속적인 쾌락의 정원’이라는 작품이 있고, 산드로 보티첼리의 ‘지옥도’가 있습니다. 문학작품으로는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이 유명하고 한국 불교 유산으로도 지옥을 묘사한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림이 곧 서술이 되기에 그림을 보고 있으면 스토리가 만들어집니다. 어떤 죄를 지어 지옥에 갔는지를 그림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보여주는 지옥은 불의한 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해설에서 목사님은 불의한 자들이 짓는 죄를 성적인 부도덕과 권위를 멸시하는 행위로 정리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예를 든 죄목입니다. 묵상을 할수록 내가 지옥행 죄에서 멀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님의 용서와 은혜를 믿는 것이 죄책감을 완전히 없애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 죄를 주의하는 것이 커지면 커졌지 죄를 잊거나 무시하게 되지 않습니다. 나도 한 때 지옥이 정말 있을까-있다면 지옥에는 누가 갈까-이교도들일까, 무신론자들일까, 회개하지 않는 모든 인간일까-그러면 지옥은 얼마나 클까…끝없는 질문 속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또 한 때는 지옥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상징이라고 대강 덮고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답은 모르겠습니다. 내가 죄에서 멀지 않으니 지옥에서 멀찌감치 있는 것도 아니겠구나 싶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매일 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의지할 뿐입니다. 지상에서 사는 동안 지옥을 경험하지 않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타인에게 지옥 같은 경험을 안기지 않아야 겠다는 결심도 하게 됩니다. 우상숭배와 자아숭배가 쌍둥이이듯이 심판 때 지옥으로 가는 죄인은 살아서 지옥을 만든 죄인일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천국을 만드는 삶, 누군가에게 천국이 되어주는 삶이 목표가 되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살면서 만들어 나가는 나의 내러티브와 나의 지도에서 그리스도가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나를 보면 천국이 보여야지 지옥이 보이면 되겠습니까. 주여.

  4. gachi049 Avatar
    gachi049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면서도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보며, ‘왜 하나님께서는 즉시 심판하시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며 지켜보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 믿음의 공동체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소중한 걸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들이 심판에 이르기 전에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저희가 쉬지 않고 기도하게 하소서. 성령님께서 저희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기를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eave a Reply

Discover more from 사귐의 소리 2026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