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1장 7-13절: 사랑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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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삼가서, 우리가 수고하여 맺은 열매를 잃지 말고, 충분히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십시오. 지나치게 나가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한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다 모시고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그것을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여, 우리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그대 자매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문안합니다.

해설:

“속이는 자들”(7절)은 요한일서에서 언급한 “거짓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을 부정한다. 물질과 육신은 부정하다는 이원론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을 거짓으로 “속이는” 일이며, “그리스도의 적대자”(적그리스도)의 행위다.

장로 요한은 수신자들에게 “스스로 삼가라”(8절)고 경고한다. 속임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수고하여 맺은 열매”는 그들의 믿음을 말한다. “포상”은 헬라어 ‘미스토스’의 번역인데, 이것은 수고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가리킨다.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한 보상은 영원한 생명이다. 

“지나치게 나가서”(9절)는 한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라고 하셨다. 진정한 자유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을” 때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유가 아니라 방종이며, 그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 

장로 요한은 “속이는 자들”이 찾아오면 집에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유랑 전도자를 환대하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 칭찬할 만한 미덕으로 여겨졌다. 문제는 속이는 자들이 순진한 사람들의 친절을 이용하여 그들의 이단 사상으로 미혹하는 데 있다. 따라서 인사도 하지 말라고 이른다.  

마지막으로 장로는 그들에게 할 말이 많지만 직접 가서 말해 주겠다고 약속한다(12절). 이 말에서 속이는 자들의 위험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문안 인사로 편지를 마친다(13절). 

묵상:

속이는 자들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는 요청은 지나쳐 보입니다. 왜 이렇게 단호한 처신을 요구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야 합니다. 마지막에 쓴 내용으로 짐작컨대, 장로는 멀지 않은 시간에 수신자들을 만나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편지는, 그 시점까지 지체할 수 없는 위급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쓰여진 것입니다. 매우 호전적인 이단자들이 수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에 부랴부랴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장로가 단호하고 냉담한 처신을 요구한 사람들은 악의적인 이단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순진한 사람들의 친절을 악용하여 그들의 왜곡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언급한 대로, 그들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려는 관심은커녕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감언이설에 말려들면, 몸도 마음도 모두 망가져 버립니다. 그런 위험을 알기에 장로는 그들에게 철저하고 단호한 태도로 맞서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요한이서는 “사랑의 한계”를 가르치는 편지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장로는 사랑과 진리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진리에 근거하지 않은 사랑은 위험하고,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갑습니다. 진정한 진리는 사랑으로 표현되고, 참된 사랑은 진리에서 나옵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유보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요절: 7절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말로 속이는 자요,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기도: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참된 진리를 발견합니다. 그 진리를 먹어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럴 때 저희의 사랑이 온전하여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4 responses

  1. gachi049 Avatar

    주님, 연약하고 무지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세상의 감언이설과 속임수로 믿는 자들을 옭아매고 종 삼으려는 악한 시도들이 가득합니다. 성령 하나님, 저와 늘 동행하사 영의 눈을 밝혀 주시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게 하소서. 악한 자들의 꼬임과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저의 마음과 생각의 파수꾼이 되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흰구름 낀 하늘이 하얗게 비춰오르는 아침, 수요일입니다. 어제는 교회 회의 때문에 좀 늦게 잠자리에 들었네요.

    단 한장으로 이뤄진 짧은 서신서, 요한이서를 마무리합니다 (요이1:7-13). 한장의 파피루스에 딱 들어가는 분량이라고 하네요. 마치 전보처럼 급하게 전할 말을 전하고 자세한 얘기는 곧 얼굴보고 하자. 이렇게 마무리하는 느낌?

    성육신의 교리를 부정하는 이단 전도자들. 미혹되어 원래의 신앙고백에서 떨어져 나가는 지체들.

    ‘앞질러 나가’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는 사람들 (who runs ahead and does not continue in teachings of Christ). “Run ahead”라는 NIV의 번역은 헬리어 원문 (프로아고: 나아가다, 떠나다)의 과도한 번역 (Copilot)이라고 하네요. 그런데도 ‘걷다’ (walk)라는 단어와의 ’뛰다‘의 대조 (run vs walk)가 마음에 들어와 꽂힙니다. 함께 걷자 하시는 주님. 길도 방향도 모르면서 치달리고만 싶은 마음. 늘 불안하고 쫓기는 내 마음.

    이제 하루를 시작할 시간. 어제는 회의 때문에 평소보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네요. 그래도 꽤 깊게 잠을 자고 아침엔 가뿐히 눈을 떴습니다. 또 한번 허락된 오늘이라는 생명의 시간. 그 하루를 함께 걷자고 말씀하시는 주. 그 분을 신뢰하며 그의 사랑안에 머무는 오늘이 되기를. 내 조급함과 불안, 지치고 수고하는 모든 짐들을 그 분께 맡기고, 자녀답게 아버지의 의와 나라를 먼저 구하는 나날.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 되고 구하는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삶. 그런 삶을 주시길.

  3. Bill Kim Avatar
    Bill Kim

    사랑의 아버지 진리와 생명의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하신 거룩하신 영에게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비록 느끼지는 못하지만 같이 하시겠다는 약속을 꼭 붙잡고 삽니다. 제 안에 제 위에 제 주위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온세상 특히 믿는 사람들의 구세주이신 주님을 세상에 알리며 사는 오늘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을 알리는것이 진정한 사랑인것을 생각면서——아멘.

  4.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거짓 선생들에 대한 경고가 사뭇 단호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이외의 것을 가지고 찾아 오는 사람을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 다툼이 없어야 한다는 주일 설교를 기억하며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려니 잠시 막힙니다. 다양성을 품는 것과 본질을 지키는 것의 긴장이 되살아 납니다. “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 격언이 생각납니다. 본질과 비본질을 잘 구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탕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토대 위에 지혜가 섭니다. 요한 2서가 사랑의 ‘한계’를 가르치는 편지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는지 모릅니다. 공동체가 우선이고 지체는 그 다음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봅니다. 영지주의 같이 막강한 이론이 교회 공동체를 흔들어 댈 때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식으로 마음을 열고 다 받아 들이면 교회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인간의 성 human sexuality 이슈가 교회를 흔들 때도 이런 우려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동성애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수용되는 세태라 해서 교회 또한 다 받아 들여야 하는가. 실제로 교우들이 교회를 떠난 ‘결정적인’ 이유는 의견이 다른 교인들이 다퉜기 때문이 아니였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다투거나 싸우지 말아야 한다는 강박이 다른 데서 터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존심과 혈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교회 동성애 이슈가 본질적인 이슈인지 아니면 비본질적인 여러 이슈 중 하나인지 깊이있게 생각하고 대화하는 시간은 아예 없었습니다. 교단에서 갑자기 생긴 이슈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교인들은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다녔습니다. 소그룹에서나 교회 모임, 혹은 설교 시간에도 성찰과 사색을 위한 자리는 없었습니다. 교회는 그동안 이 이슈 뿐 아니라 다른 여러 일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무심함 (혹은 안일함)으로 대처해 왔습니다. 관성에 의해, 하던대로, ‘위에서’ 시키는대로 (여기서 위는 어디를 가리키는지도 묻지 않고) 하는데 익숙했을 뿐입니다. 고민은 계속 됩니다. 참과 거짓의 경계를 찾아내기 어려운 지금은 더욱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거짓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을 때는 참된 것에 더더욱 기대야 합니다. 나의 고민과 의문 가운데 빛으로 계시는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주님을 보았으면 풍랑은 그만 보고 주님께만 시선을 고정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를 도와주세요.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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