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기에 대해

2–4 minutes

To read

음성듣기

앞으로 2개월 동안 여호수아서를 읽고 묵상합니다. 올해 초에 민수기를 읽었는데, 여호수아기는 그것에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신명기는 모압 평야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설교입니다. 설교가 끝난 후 모세는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고 열두 지파를 축복한 다음 느보 산에서 생을 마칩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자면 민수기에서 여호수아기로 가야 합니다.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가, 여러 차례의 정복 전쟁을 치루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줍니다. 여호수아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1장부터 12장은 정복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를 다닌 분들이라면 여호수아의 전쟁 이야기들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대부분 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13장부터 21장까지는 정복한 땅을 지파별로 분배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은 가나안 땅의 지리를 알아야 이해하기 쉽습니다. 22장부터 24장까지는 여호수아의 설교와 죽음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호수아기의 내용은 아브라함을 불러내면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는 과정의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 본다면 칠백 년이 넘는 긴 우회로를 지나 실현되었습니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었다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따라 나선 후 야곱의 가솔 칠십여 명이 이집트로 내려가기까지가 약 이백여 년이고, 이집트에서 머문 시간이 약 사백여 년이며, 광야 유랑이 사십 년이었습니다. 

문학 양식으로 본다면, 여호수아기는 “역사적 고백” 혹은 “고백으로서의 역사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기는 사무엘기와 열왕기를 기록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바빌로니아에게 패망하여 포로로 잡혀 갔던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원하며 그동안의 역사를 정리합니다. 단순히 역사적 관심사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어떤 은혜를 베푸셨으며, 우리는 어떤 점에서 실패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민족적 탁월성이 드러납니다. 민족적 위기에 처하여 지난 역사를 정리하면서 자신들이 누구이며 어떤 사명을 부여받은 존재인지를 확인합니다. 그 과정에서 성령의 영감이 임했고, 후대 독자들은 그 “고백적 역사 이야기”를 읽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사명을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의 원인이 되어 주었습니다. 

현대 독자들은 여호수아기와 사사기를 읽으면서 전쟁 과정에서 드러난 잔인성과 야만성에 당혹감을 느끼곤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복당한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명령을 그대로 실행하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어린아이뿐 아니라 가축까지, 생명 있는 것은 모두 끊어버리라는 “진멸”(히브리어 ‘헤렘’)의 명령은 우리가 아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에게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대적 기준으로 하자면,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은 “인종청소”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기를 “역사적 고백”으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역사 이야기들은 바빌로니아에 의해 패망하여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이 과거에 하나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얼마나 압도적인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강조하기 위한 수사적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강조될수록 그 은혜를 저버린 자신들의 죄가 더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함께 하면 어떤 전쟁에서든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이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민족이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희망을 가지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적 사건들 중에 이순신 장군의 해전 이야기는 가장 자주 소설이나 영화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럴 경우, 작가나 감독은 역사를 정밀하게 재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사가들이 할 일입니다. 작가나 감독은 역사적 정확성이 아니라 역사적 교훈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선에서 승리의 “압도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그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감동하고 환호합니다. 그러한 감동은 자신의 정체성과 역사적 전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만듭니다.

여호수아기와 사사기를 읽는 동안 우리는 “객관적인 관찰자” 시점이 아니라 “새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읽어야 합니다. “저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새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읽을 때, 우리는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용기와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불신의 땅에서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과 같고,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간 유대인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 불신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은 정복전쟁이나 포로생활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읽고 묵상할 때, 전쟁 이야기들은 어릴 때 읽고 느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입니다.  

3 responses

  1. Bill Kim Avatar
    Bill Kim

    “나와 내 가족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겠다“라고 결단한 여호수아의 선언이 기억납니다, 제 자신의 소망은 저의 아내 뿐만 아니라 자녀들과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포함되는 가정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사귐의 소리 식구 모두가 믿음의 가정입니다. 이 소망을 위해 기도하는 사귐의 식구 모두가 되어 승리하는 매일의 일상이 되도록 도와 주십시오.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에 안겨 새로운 믿음의 가족들이 된것을 감사하며——아멘.

  2. tenderlya0860fa447 Avatar
    tenderlya0860fa447

    높고 푸른 하늘과 상쾌한 바람. 버지니아의 여름과 아쉬운 이별을 느끼며 가을의 문턱을 넘어들어 가는 듯한 아침, 화요일입니다.

    오늘은 성경본문 대신 앞으로 두 달 동안 공부할 여호수아서에 대한 목사님의 길고 영감있는 인트로
    글을 읽습니다. 가을과 함께 방학이 끝나고 일도 성경공부도 다시 개학을 맞는 느낌이라고할까요? 민수기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시점 (여호수아의 시점, 저작자의 시점, 독자의 시점)에 주목하며 읽어야할 것 같아요.

    40년의 광야 유랑이 끝나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꼭 전쟁의 불가마를 지나야하는 것일까요? 그 속에서 내 안의 악을 헤렘(=진멸)하고 죄의 종 노릇하던 옛자아를 완전히 비우고 주의 약속, 오직 그 약속만 믿고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걸까요? 위험과 죽음, 실패의 무서움이 큰 입을 벌리고 있는 저 곳, 여리고를 향해서?

    메트로를 타고 출근합니다. 가을의 문턱이라 그럴까요? 사람들의 얼굴이 분주하고 긴장되어 보이네요. 편안히 잠을 자고, 거뜬히 일어나 오늘이라는 이름의 소포 상자를 열고 있어요. 아직도 일할 수 있어서, 돌봐야할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 가족으로 인해 감사.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 그 언약과 새로 주신 정체성을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인생. 이해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들이 끝없이 깔려있는 이 광야.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부랑’을 ‘행군’으로 ‘공포’를 ‘진군’으로, 그 확신의 나팔소리로 바꾸어 가는 나날, 그런 인생을 주시길.

  3. young mae kim Avatar
    young mae kim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인 여호수아서를 시작하려니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는 느낌입니다. 비장함과 웅장함이 느껴집니다. 새학기가 시작하는 시기이고, 또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후반기에 접어 들어서 더욱 그런 것도 같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에게 벌써부터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지파 사이에 나누어 영원히 행복하게 happily ever after 사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읽으면 그렇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던 백성에게 여호수아서는 저주의 이야기에 가까울 것입니다. ‘폭탄 맞은’ 이야기가 되겠지요. 내일부터 토요일까지 사우스 다코다의 블랙힐스 지역으로 여행을 갑니다. 한인 여선교회의 선교 세미나에 참석하는 여행입니다. 네이티브 원주민 선교사역을 하는 장로교단의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세미나와 현장 방문입니다. 준비 자료를 보니 미국 정부의 서부 개척사는 미국에는 개척사이고 원주민에게는 학살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감리교단은 1990년대부터 ‘치유와 화해 사역’에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선교의 깃발 아래, 알게 모르게 해를 끼친 일들을 찾아내어 회개하고 사과하고 치유와 화해를 위해 동역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토착인들의 삶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여호수아 시대의 일들을 이제 어떤 마음으로 읽게 될른지 나 자신도 궁금합니다. 믿음은 능동태이면서 수동태입니다. 믿음은 지켜야 하며 또 키워야 하기도 합니다. 지키는 방법은 수호와 방어입니다. 키우는 방법은 확장과 공격입니다. 진취적이어야 할 때와 관망해야 할 때를 분별하면서, 이스라엘의 마음으로 여호수아를 읽고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백성의 눈으로 가나안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우리 시대의 아픔과 허물을 부인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Discover more from 사귐의 소리 2026

Subscribe now to keep reading and get access to the full archive.

Continue reading